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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타임즈 기사 (1905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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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한 강연 활동과 고된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아들 봉수鳳秀 (아명:태산泰山)를 돌보아줄 수 있는 미국인 가정의 도움을 요청했다.

기사에서는 이승만의 한국에서의 행적과 미국에 온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본 문]


이 광고는 어제 우리 타임지의 칼럼란에 게재할 것을 요청 받은 것으로 이 어린 아이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도와 그 소년이 거주할 곳을 찾아주려는 목적이다. 그 곳에서 이 소년이 영어교육의 기초를 배우고 적절한 때가 오면 아이의 조국인 먼 나라 한국에서 선교사가 되어 기독교인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것이다.

이 광고의 이면에는 그 자신과 그의 어린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어느 한국 출신자의 비상한 용기와 인내심, 박해와 투옥에도 굴하지 않은 결심의 스토리가 담겨있다. 이승만이 표현한 대로 "한국은 지금 절실하게 기독교를 필요로하고 있다. 기억도 할 수 없이 오래 전부터 그 나라를 지배해온 유교를 대체하기 위해."

기숙사에 살면서

이승만과 어린 아들 이태산은 두 달여를 북서로 1234에 위치한 기숙사의 작은 홀룸에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부양하면서 동시에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다.

이승만은 3년 안에 그 지방대학의 학위코스를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신학교의 정규코스를 마치려 하고 있다. 그 후에 그의 여정은 그의 모국으로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나라에서 그가 감리교회의 깃발아래 선교사가 될 것이다. 짧지만 극도로 분주했던 이승만의 삶을 이 소개장에 담긴 글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소개장은 이승만이 품에 안고 이 나라로 가져온 것으로 16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제임스 게일 목사가 쓴 것이다.

어떤 슬픈 인물전

"이 글은 독자에게 1875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 이승만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유생의 고전적 방법으로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그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일찍이 깨달은 그는 그의 정력을 영어와 다른 몇 가지 분야에 대한 공부로 돌렸고 이를 통해 중국식 관습을 극복했다. "

"그는 독립정신을 신봉했다. 단지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독립 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무기력에서 깨어나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일간지, 제국신문을 개간했다. 영문기사의 번역과 함께 그는 자유 사상을 가르쳤다."

"이런 행위는 보수적인 정부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1898년 9월에 체포했다. 그리고 그는 재판없이 6년간 수감되었다."

차꼬와 형틀

"7개월간 그는 차꼬라고 하는 20파운드 이상이 나가는 거대한 나무로 된 목을 감싸는 형틀을 착용했다. 이 기간에 그의 고통을 더하기 위해 준비된 형틀을 발목에 차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는 그의 동료죄수들이 끌려나가 맞고, 고문 당하고, 교수형 되고 참수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형장에서 무거운 칼날이 만들어내는 섬뜩한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그 자신에게도 그 운명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최소한 한번 이상 조간신문이 '이승만이 참수되었다'라고 발표했다."

"그는 한 무리의 죄수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무거운 쇠사슬이 그의 어깨를 묶고 등뒤에서 결박된 채로. 이 모든 것이 그가 그의 동료들과 만나 토론하고 회담하고 상호발전을 도모할  만민공동회의 권리를 주창한 죄였다."

"그는 감옥에 가기 전에도 찬송가를 들었었지만 고통과 고독함에 이르러서야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그의 동료죄수들의 구원을 위해 몸바쳤다. 그는 감옥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다. 상해에서 출판된 한문 장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재판을 받았고 8월 9일에 무죄로 판결받아 석방되었다. 그는 황인종의 슬픔에 대해, 모두 뼛속 깊이 진실인,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 그는 많은 친구들을 상대하기 충분하다. 그는 귀한 집에 태어나, 학자이며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유학을 오다

이승만은 12월에 미국에 와서 곧바로 학업을 시작했다. 두 달전에 그의 두 친구 이인흥과 이관영이 평양에서 워싱톤으로 오면서 그의 일곱 살 아들 태산을 데리고 왔다. 두 명의 이씨 친구들은 영어를 못했다. 한동안 이승만은 그의 아들을 돌보고 그의 친구들이 머물며 영어를 공부하도록 집을 찾느라 애썼다.

얼마 전에 그는 햄라인 감리교회의 신도들의 협조를 얻어냈다. 이제 이인흥과 이관영은 중부연합교회에서 머물면서 교회의 부인들에게 영어교육을 받고 있다.

그를 서울의 감옥에 투옥시킨 그 신문에 대해 질문을 받자, 이승만은 설명하기를 그 신문은 일간지였고 출판은 영향력있는 친우들이 조성한 기금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 신문은 한국에서의 최초의 일간지이며 평론, 정부활동에 대한 구하기 어려운 기밀뉴스, 그리고 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지면을 채웠다. 철저한 보안 속에 편집자는 이승만의 글을 그가 수감된 중에도 게재했다. 그는 그의 출판물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것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분노

종전이 가까운 러일전쟁의 영향에 대해서, 이승만은 자신감을 가지고 달변을 털어놓는다. 그는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만을 유지할 것이며, 일본의 군사적 지배가 은자의 왕국 구석까지 퍼질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태산이 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가 이곳에 있으므로 이승만은 그를 위해 철저한 교육을 계획하여 그의 조국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여러 명의 부인들이 태산이를 입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건이 된다면 나는 애가 학업을 마칠 때까지 여기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애가 조국을 잊으면 안되지요."

영리한 소년

"최소한 여름 동안 아이를 자식처럼 받아줄 신실한 개신교 기독교도 가정이 필요합니다." 이승만은 타임즈지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영리하고 적극적이고 강합니다. 그는 거의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린 태산이에 대한 그 아버지의 설명은 완전히 진실이다. 그 소년은 전혀 일곱 살처럼 보이지 않는데 아이의 키가 작아서 그러하며 그것은 한국인들의 인종적 특징이다.

그의 아버지도 보통의 15살짜리 미국소년 정도의 키다. 부자가 동양인의 전형인 아몬드색 눈빛을 가지고 있다. 어린 태산이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동그랗다. 그 아이는 이미 여러 영어단어를 알고 있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한다. 그래도 첫 만남에서는 아이를 미소로 사로잡는 것은 어렵다.

학교에서 학생으로

워싱턴에 도착한 이래로 그 소년은 프랭클린 학교의 1학년으로 있었다. 거기서 그는 영어알파벳을 익히고 26개의 괴상하게 생긴 문자를 가지고 단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집에서 알파벳과는 퍽이나 다른, 거의 무제한의 숫자를 가진 한국의 문자들을 연습했을 것이다.

꼬마 태산이 - 꼬마라는 형용사가 그 아이를 부르는 특히나 적절하다-는 미국 옷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어제 그는 또래의 다른 도시 아이처럼 작은 청바지에 질긴 셔츠를 입고 축구처럼 과도한 사용에도 버틸 수 있다는 모자를 썼다.



 

HOME IS WANTED FOR KOREAN BOY (Taisanah Rhee May Become Nations Messiah)

FATHER HAS SAD HISTORY _ Filled With Progressive Ideas Started Daily Newspaper and Thrown Into Jail


PLEA FOR AMERICAN SYMPATHY COMES FROM THESE KOREANS LITTLE TAISANAH RHEE AND HIS FATHER


Home Is Wanted for the Boy Until His Education Is Completed 


This is the advertisement which The Times yesterday was requested to insert in its columns in an effort to aid Sung Mahn Rhee, the little lad’s father, to find an abiding place where his boy might be given the rudiments of an English education and in time become a missionary and carry Christianity into far off Korea, his birthplace.

Behind the advertisement lies a story of unusual pluck and perseverance on the part of a native of Korea, and of his determination in the face of persecution and imprisonment, to prepare himself and his tiny son for the ministry. As Sung Mahn Rhee expresses it : “Korea no greatly needs Christianity in place of Confucianism, the religion which has reigned from time immemorial.”

Living in a Boarding House.

For two months and more Sung Mahn Rhee and little Taisanah Rhee have been living in one of the tiniest hall rooms in the boarding house at 1234 I street northwest, the father seeking to support his son and at the same time attend to his studies at 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Sun Mahn Rhee proposes to finish in three years the course at the local university, gain his degree and also take the full course at a theological seminary. After that his course will be laid straight back to his mother country. Where he will enlist in missionary work under the banner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Probably no better synopsis of the short but exceedingly busy life of Sung Mahn Rhee can be given than that contained in the letter of introduction, he bore to this country, written by James S. Gale, a missionary, sixteen years in the field in Korea. The letter follows :

A Sad Biography.

“This will introduce to the reader Mr. S. M. Rhee, or Yee, a Korean born in Seoul in 1875. He was well educated according to the old methods of Chinese scholarship, but early feeling the insufficiency of this for the present age of the world, he bent his energies to the study of English and other branches that lay open to him through the Chinese.”

He Believed in independence, not only that Korea should be independent of China, but that the Korean people should awaken from their torpor and think and live.”

“He started a daily paper, The Chay-Gook Shin-Moon (the Empire), that contained translations from English. In it he preached ideas of liberty.”

This was contrary to the conservative government. The had Mr. Rhee arrested in September 1898, and for six years he lay in prison without trial.”

Caque and Stocks.

“For seven months he wore the caque, a huge wooden collar weighing twenty poundsor more. During this time, to add to his agony, he sat with his fee in the stocks.”

“He saw his companions taken out beaten, tortured, hanged, and beheaded. He knows all the sensations that go with the heavy thud of the sabers on the execution ground, which fate he fully expected for this own. More than once the morning papers announced. ‘It is reported that S.M. Rhee was beheaded in the night.”

“He walked in the coolie gang with a heavy iron chain fastened over his shoulders and padlocked at the back all because he claimed the right of popular assembly where he and his companions might meet for debate, conference, and mutual improvement.”

“He had heard the gospel before going to prison, but only in his agony and loneliness did he learn to trust. From that time forth he set himself to see his fellow-prisoners saved. He had a library, started in prison, a library of Chinese publications from Shanghai.”

“He was tried last summer(1904). On August 9 he was pronounced not guilty and set free. He can tell a wonderful tale, all true to life, of the sorrows of the yellow race. He is altogether worthy of friends, for he is a gentleman born, a scholar, and Christian.”

Come to Study.

Sung Mahn Rhee came to America in December last and immediately took up his studies. Two months ago two of his friends. In Heung Lee and Kwan Young Lee, from Peung Yang, came to Washington, bringing with them Rhee’s seven year old son, Taisanah. Neither of the Lees could speak English. For a time Rhee was burdened with the care of his boy and with trying to find a place where his countrymen could be housed and started on the way to learn the language. Not long ago he succeeded in interesting members of the Hamline M. E. Church. Now In Heung Lee and Kwan Young Lee are quartered at the Central Union Mission, while ladies of the church have undertaken their instruction in English.

Asked concerning the paper which caused his incarceration in the prison at Seoul. Sung Mahn Rhee explained that it was a daily, and that it was conducted principally with the aid of funds subscribed by influential friends. It was the first daily paper in Korea, he said, and much of its space was devoted to criticisms, publication of otherwise secret news of government doings, and to education. By utmost secrecy the editor managed to continue his writings even while in his cell. He has the satisfaction of seeing his publication prospering to the present day.

Bitter Against Japan.

On the subject of the results of the present Russo-Japanese war, which the predicts is near its end. Sung Mahn Rhee talks well and with strong feeling, declaring that the Japanese are not living up to their promises, that Korea has been given only a nominal independence, and that Japanese military rule is spreading to all corners of the Hermit Kingdom. The coming of Taisanah Rhee was unexpected by his father. Since the lad is here Sung Mahn Rhee has planned for him the most thorough education that the may be of value to his country.“Several ladies have wanted to adopt Taishanh,” said the father, “but that is not what I want. If the surroundings are what is to be desired I am willing that he stay here until his education is completed. After that he must not be lost to his country.”

A Bright Boy.

“A good Protestant Christian family who would take him as their own child, at least for the summer, is wanted.” said Mr. Rhee in his letter seeking the aid of The Times. “He is bright, active, and strong. He is almost taking care of himself.” And this, the father’s description of little Taisanah, is true to life. the boy scarcely looks his seven years, but that is on account of his short stature, a national characteristic of the Koreans. His father is no taller than an average fifteen-year-old American boy. Father and son have the almond eyes typical of the Oriental. Little Taisanah’s face is round almost as a full moon. He knows may English words already, his father says. On first acquaintance, however, he cannot be persuaded even to smile.

Pupil at School.

Ever since his arrived in Washington the boy has been a regular pupil tin the first grade at the Franklin school. There he has acquired the English alphabet and begun constructing words from the queer looking twenty-six letters, so different from the almost unlimited Korean symbols with which his daily exercises were held at homes. Little Taisanah - the adjective seeds particularly appropriate in speaking of him - takes naturally to American clothes. Yesterday he was clad much as any other boy of the city whose parents desired him to have the best of times, in diminutive trousers of blue-jean, a shirt of tough material, and a cap, the last named warranted to stand any amount of use as a foot-ball. 





결국 보이드 부인(Mrs. Boyd)이란 사람이 태산이를 맡아 주었고 그녀는 다시 태산이를 보육원(Western Home for Children)에 맡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덟 달 만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1906년 2월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사망한다.

이승만은 오후에 아들이 위독하단 소식에 급히 달려가 다음날 새벽 보이드 부인집으로 당도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승만은 문병할 계획, 검역조치에 대해 상의하며 병원으로 가는 기차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오전 11시에 전보를 받았다. 전날 7시에 아들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일 저녁 5시에 장례식을 치렀다.

이태산은 Oddfellow Cemetary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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