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뉴욕타임즈 사설 (1919년 5월 18일, 6월 1일) > Article

본문 바로가기

Article

이승만의 뉴욕타임즈 사설 (1919년 5월 18일, 6월 1일)

페이지 정보

조회 2,109회

본문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는 래드 교수의 글에 대해 반박하는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New York Times  1919. 5. 18 

 

귀지가 와이드 칼럼으로 게재한 래드 교수의 한국관련 기사는 명백히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은 래드 교수가 소위「프러시아 군국주의」라고 표현한 일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큰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한 교수의 말은 미국사회에서 신성불가침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 말들이 만일 익명의 필자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세심한 분석 없이 지나치게 된다.

이 사실은 교수직에 있는 사람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부과한다. 래드 교수의 기사에 대한 검토 작업은 그가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한일 간 역사에 관련된 어떤 것을 확신시키게 될 것이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 저항운동은 모종의 비밀결사들이 꾸민 음모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확신을 갖고 이 단체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 설립된 이 단체들의 규모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정보」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가? 래드 교수는 명백히 이 조직들의 조직원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갖고 이 정확한 정보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 미국에 있는 일본 선전자들의 귀뜸에만 의존한 것이라면 그는 이 정보가 자신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어야 했다. 한국독립동맹은 한국에 있는 것을 빼고는 모두 비밀단체가 아니다.

또 한국에 있는 단체의 비밀성이라는 것도 명백히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마저 이젠 옛날 예기다 . (그가 말한대로) '천도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영향력이 있는 것' 이 아니며 기독교 조직도 분명히 아니다. 물론 이 단체의 회원들은 이 단체의 회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민비시해에 관한 래드 교수의 평가를 보면 그가 일본을 변호하는 데 얼마나 법석을 떨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야수적인 이 살인극에 대한 래드 교수의 평가는 그의 저서「In Korea with Marquis Ito」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점잖은 이토 후작은 이 책을 보고소 '매우 훌륭하다. 너무 휼륭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비록 그 살인이 민비의 정적인 대원군의 음모로 일어난 것이지만 일본 정부는 결코 책임을 분담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다.(p. 210)>

다음은 암살 사건을 꾸민 미우라 자작에 대한 일본 법정의 예심기록 중 일부다.

 

<우리는 미우라 고로가 1896년 황제의 명을 받아 주한 전권대사 및 전권공사에 취임했다. 당시 한국의 조정은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질서와 혼란이 황국정부(일본)의 지도와 충고에 의해 갓 재구성된 한국의 정부에까지 침투했다. 한국 조정은 일본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피고인들(미우라 등 여러 사람)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긴급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 미우라는 대원군으로부터 은밀하게 암살 결행을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은 공사관에서 회의를 열고 왕비(민비)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은 '당신이 미우라 공사에게 원한 것을 결정했다'는 내용의 메모로 대원군에게 전달했다. 대원군은 이에 동의했다.>

 

이상의 내용은 미우라의 자랍적인 진술에 의한 것이고 여기서 그는 암살계획을 자신의 롱로로 돌리고 있다. 미우라의 진술은 '왕비는 남편과 같이 있다 한쪽으로 끌려나와 살해됐고, 시체는 공개된 광장에서 불태워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facts)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꾸민 암살계획을 실행하는 데 실제로 참가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미우라 등을 석방했다.

미우라는 단숨에 일본에서 영웅이 됐고 그의 훈장과 직책을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래드 교수는 항상 일본 정부의 견해를 따랐으며, 미우라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그것은(단지) 무분별한 행동이었다'고 표현했다. 래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그들의 운명을 기탈할 대상은 일본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반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지치를 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 한국인들이 스스로 자치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니 !

이런 말이 일본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은가? 세계 콜롬비아 박람회의 일본제국위원회가 편찬했고 래드 교수의 동료인 예일대의 카자카와 교수가 보충한「일본제국의 역사」라는 책을 인용하고자 한다.

 

<도고 제독은 1905년 5월 28일의 울릉도 전투에 대한 보고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기적은 완전히 황제 덕분이며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던 것은 황가 조상들의 음덕으로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래드 교수는 "한국인들은 아직도 과거의「자유로웠던」시절을 자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결코 그런「자랑」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래드 교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살아 있거나 죽은 한국인들을 인용할 자격이 없다. 일본인 선전가들은 종종 한국의 과거 정부가 통치를 잘못한 예로 들거나, 현재 일본 통치 아래에서 진행되는 한국의 현대적 발전을 그들의 우월함의 예로 든다.

과거 한국을 현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현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불공정한 것이다. 일본 자체를 예로 들자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본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정부는 통일된 완전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 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모든 물질적 성과는 사실 한국인들이 스스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제 한국을 발가벗겨 버렸으며 그들의 토지를 약탈하고 절과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계통 학교를 폐쇄했으며 학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일본은 한국 어린이들에게 미카도와 그 조상들을 숭배하라고 강요했고 학생들의 해외여행을 금지시켰다.

한국인들은 과거 왕조시대에 적어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주택과 감옥은 이곳을 방문했던 모든 유럽인들이 놀랄 정도로 청결했다. 한국인들의 도덕성은 다른 어느 동양국가들보다 뛰어나며 한국을 통치하는 일본인들보다도 명백히 우월하다. 래드 교수는 일본 고리대금업자의 손아귀에 떨어진 한 한국인이 빌린 돈을 애인에게 허비한 얘기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과연 미국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승만






래드 박사의 글에 대한 답변

 

 

New York Times  1919. 6. 1

 

나는 지난 호 선데이 타임스에 게재된 래드 박사의 글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그 기사는 나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도 이 글을 쓴다면 일부 일본의 선전자들은 파리평화회담장에서 일본 대표들이 미국 대표들과 나란히 앉을 정도로 강대국인 일본을 비판했다고 욕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그러한 공격과 불공정한 비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들의 친구나 적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밝히는 데 단호하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래드 박사의 정보원들은 그에게「한 유명한 한국인이 선동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시민연맹을 조직했다」는 뉴스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 뉴스가 맞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즉 일본 경찰은 기미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성명서를 갖고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서명을 하도록 했다. 이 성명서는 일본인들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파리평화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일본의 자애로운 통치로 한국에 이상향이 건설됐다」고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던 일본의 의도는 한국인의 저항운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최근 결정된 소위「하늘 숭배자들」의 조직(천도교)이 원래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일본 당국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3백만 명의 회원을 가진 그런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 아래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친구들에게는 놀랍고도 실망스럽게 이 하늘 숭배자들은 그들의 독립운동으로 기독교 불교 유교와 행동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토 후작과 함께」라는 래드 박사의 저서에 관한 나의 언급과 관련, 래드 교수는 이토 후작이 한국의 순종 황제를 모욕하는 얘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이야기는 충분히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권력 숭배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충분히 고립무원의 기울어져가는 황제를 감히 모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와 이토 후작이 그 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보면 누구나 어이없어할 것이다.

'일부 시위자들은 일정한 돈을 받고서 경찰서를 공격하고 자기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지시받았다'는 내용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말이다. 한 작은 소녀가 단지 소리를 지르거나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들에게 양팔을 잘려 버리는 그러한 나라에서 어떻게 돈을 받고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성적이고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실에 배치되는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Miracle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