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의 밑거름된 이승만의 농지개혁 [김학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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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1950년 4월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농지개혁은 한국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300년 동안 이용후생학파가 주장하던 실학의 정수가 현실이 됐다.
이승만은 청년 시절부터 실학의 실천을 주장해온 만큼, 그의 농지개혁은 평생의 숙원이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그가 실시한 의무교육, 국민개병제, 상공업장려, 남녀평등, 사민평등, 국제통상도 5000년 역사에 일대 개혁이다. 한국 역사에서 당파싸움도 그 속은 토지쟁탈전이었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며 제일 먼저 손댄 것도 토지조사사업이었다.
3·1운동은 일본지주에 대한 한국인 소작쟁의가 가장 심했을 때 터졌고 그 후 계속적으로 소작쟁의는 일어났다. 독립한 대한민국 건국정부는 이 농지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여전한 지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단행을 했다. 이승만은 1946년 2월 6일 라디오로 전국에 27개조의 계획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다음이 포함돼 있다. 9조-농지개혁을 한다. 10조-농지개혁은 유상원칙을 적용한다. 다시 말하면 1950년 남한 농지개혁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유상매입-유상분배이다. 원칙적으로는 자본주의 형태이지만 경자유전과 농지상한의 조건이 부여됐다.
1946년 유상매입 - 유상분배 원칙 천명
정부는 지가증권을 발행해 지주들로부터 농지를 매입했다. 분배받은 농민은 매년 소출의 30퍼센트씩 향후 5년간 갚기로 했다. 농지가격을 1년 소출의 150퍼센트로 정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 농지개혁과 다르다. 게다가 무상분배를 했다 하지만 농민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국가 소유로 농민은 경작만 하는 개혁이었다. 국가의 눈에 들지 않으면 그나마 몰수되는 제도였다. 이것은 누대의 실학자들이 꿈꾸던 개혁이 아니었다.남한에서 지가증권을 받은 지주들은 6·25 전쟁으로 인한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그 가치가 급락하자 부산 피난생활에 그것을 투매해 생활비로 써버렸다. 당시 호남지역에서 20정보 이상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것을 보면 산업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47명에 불과했다.정부는 관련법을 고쳐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해 이를 귀속업체 인수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대체로 지가증권의 50퍼센트가 산업자본이 됐다. 6·25 전쟁만 없었어도 농업자본이 온전히 산업자본으로 전환했을 것이다.외국 전문가가 보는 눈에도 남한의 농지개혁은 성공한 것이다. 이승만이 건국을 하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 가운데 하나가 한국은행을 창설한 것이었다. 조선은행은 식민지 착취기관에 불과했기에 자본주의 경제제도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재무부 장관 김도연 박사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에 서한을 보내 전문가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때 내한한 경제학 교수 브름필드 박사의 보고서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통상으로 한국경제의) 대외 생존능력에 진전이 보이지만 그 속도는 계속되는 물가상승으로 저지되었다.” 이 같은 대외 생존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국의 원조 없이는 비정상적인 대규모 무역적자로 한국경제는 급속히 붕괴될 것이다. … 외환사정은 아주 어렵지만 그럼에도 농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한 것으로 출발의 방향은 잡혔다.” 농지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서양 역사에서 농지개혁의 성공을 사유재산권의 확립에 두고 있었느니 만큼 “효율적인 경제조직은 경제성장의 기초 요건이다. 그러한 조직이라면 사회는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다.그러한 경우 개인이 토지, 노동, 자본, 그리고 기타 소유를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농산물이 통상교역상품으로 발전하면서 토지의 사유화 요구는 더 필수적이 됐다. 달리 말하면 토지 국유화로는 농산물이 국제시장에서 경쟁적이 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순수 자본주의 형태는 아니었다. 산업인구의 8할이 농민인 반면 농지는 부족했다. 누대의 토지문제는 소작제도였다.경작자가 농지를 갖지 못하고 소출의 반 이상을 지대와 조세의 형태로 지불하고 나면 농민은 춘궁기를 넘기기가 어려운 제도였다. 여기에 흉년이라도 겹치면 농민들은 쉽게 유리걸식을 하거나 도적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다.
소작제도와 중소농제도와 남북의 차이
정약용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조선의 지배층은 부패했고 너무 완고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일제 치하에서 농지의 3분의 1이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3분의 1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담보로 잡혔다. 그러는 가운데 물가가 하락하는 대공황기에 농민은 담보부채를 갚을 수 없게 돼 사실상 농토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3분의 2가 일본인 소유가 됐다는 계산이다.건국정부의 초대기획처장은 이순탁이었다. 그는 평소 농지야말로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중소농 제도의 확립을 주장했다.여러 관계기관의 토론과 협의와 절충을 거쳐 농지소유 상한선으로 3정보로 정하고 거주지의 8킬로미터 이내 소유라는 제한을 두게 됐다.이 주장의 백미는 이른바 가산농지제도이다. 즉, 농민이 농지를 자의대로 팔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도의 농지를 말한다. 농민은 흉년에 쉽게 희생자가 될 수 있다.이걸 막으려면 일가족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농지의 매매, 양도, 저당을 금하는 제도이다. “자기의 가족과 더불어 통상적으로 경작이 가능한 면적보다는 크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는 작지 않은 토지”를 말한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같은 시기 독립한 아시아 제국의 농지문제와 비교할 때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필리핀은 아직도 농지개혁을 못하고 있으며 인도 역시 농지개혁에 실패했다. 농지개혁의 성공으로 6·25 전쟁에서 남한이 북한을 제압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됐고 그 후 산업화에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출처]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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