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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승만 귀국 방해 두차례, 가택연금도 [김은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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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칼럼니스트


미국의 ‘기피인물’ 이승만

 

소련이 데려온 김일성이 스탈린의 꼭두각시(Puppet)였듯이, 이승만도 미국이 친미정권 만들려고 급거 귀국시킨 앞잡이였을까. 해방공간에서 지금까지 남북한 공산당의 끈질긴 선전선동에 솔깃한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면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기 바란다.미국 정부의 ‘기피 인물’ 이승만

미국에게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훨씬 전부터 <기피 인물>이었다.
일찍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 가졌던 미국과 일본, 식민제국주의 시대 미국 대통령 T. 루즈벨트를 만나려고 동분서주했던 이승만은 귀찮은 존재였다.
조미(朝美)수호조약을 지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이승만.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예언하는 이승만, 대한민국을 승인하여 일본을 견제해야 미국 평화도 안전하다고 다그치는 이승만,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반드시 한반도를 강점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승만, 소련 국제공산주의가 곧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고 장담하는 이승만---워싱턴 곳곳에 둥지 튼 친소파 실세들에게도 이승만은 헛소리꾼이었다.


결정적인 ‘기피인물’ 낙인은 카이로회담이후, 그리고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때였다.
소련을 태평양 전선에 끌어들이려 조바심친 미국과 영국, 때를 놓치지 않고 덫을 놓은 스탈린, “참전하면 해방지역을 점령해도 되는가?” “오케이.” F. 루즈벨트는 즉석 환영했고 트루먼도 인계받은 강대국들의 비밀 야합. 전쟁을 끝내면서 또 하나의 전쟁을 잉태한 시나리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즉각 반발했다. 소련의 한반도 진주 및 남북한 분할 음모를 결사반대한다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누구도 들은 척 않는 약소민족의 목소리, 고독한 선지자 이승만.


분할 점령과 좌우연립정부 수립등 스탈린과 주고받은 전후처리를 밀고 가는 미국 앞길에 한사코 농성하는 이승만은 누군가 제거해야 하는 방해물, 골치덩이 아닌가. 이때부터 미국 언론은 이승만을 ‘반미주의자’ ‘극우분자’로 매도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후일 미당국은 이승만 제거작전(Ever Ready Plan)도 은밀히 펼쳤음이 드러난다.미 국무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다

마침내 해방이다. 일본은 드디어 패망하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온지 41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해방감은 어떠했을까. 오랜 질곡의 사슬이 끊어진 순간 내 나라에 달려가고 싶은 환국의 열망은 온통 초조와 조바심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의 패전후 2개월이 지나고,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한지 5주가 지나도록 귀국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이승만은 중국을 경유하는 귀국 노선은 포기해야 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선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추진하는 미국 정책에 따라 장개석이 고립되어 갔고, 중경(重慶)의 한국임시정부도 ‘좌우연합전선’을 따르고 있었다. 1942년 12월7일 김구 주석은 몇몇 공산주의자들을 각료로 임명하였고, 그때부터 이승만은 좌우합작 정책을 포기하도록 강력히 주장해왔었다. 특히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임정의 김규식 조소앙등 합작세력에게 우선권을 부여할 것을 미국과 협의중이었으며, 이때 만약 이승만이 중국에 간다면 합작파가 한국에서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하거나 억류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마닐라를 경유하는 코스로 정하고 국무부에 여권을 신청했다. 또 미군 당국으로부터 작전지역 출입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 허가서는 맥아더 사령관을 통해 해결되었다.

국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여권 신청을 취소해주시오.“
이유는 신청서에 적힌 ‘주미 한국고등판무관(High Commisioner from Korea to the United States)’이란 직위가 적절히 못하다는 것이었다. 여권과장 시폴리 여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여권과장을 만나게 된 것은 9월21일.
이승만은 아무 직위도 필요 없고 조용히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장은 미군 허가서에도 직위를 없애라고 했다. 이승만은 허가서를 새로 발급 받은 뒤 국무부를 찾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당신의 여행 편의를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날벼락 같은 뜻밖의 선언이었다.
이승만은 군용기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오키나와나 동경에 도착할 수 있는 특별 허가증을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재발급 받아야 하며 일본에서 한국에 갈 군용기 사용 허가도 별도로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모든 절차는 국방부를 통하라는 통고만 받았다.이승만은 다시 여권과장을 어렵게 만났다. 국방부에 협조를 부탁해달라고 말했을 때 과장은 싸늘하게 거절했다. "국무 장관의 특별 허락이 필요합니다. 국무부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쓰라린 신고를 견디고 견딘 4개성상의 세월, 해방된 한국에 가겠다는 한국지도자를 미국이 왜 막는가. 그럴 테지...이유는 이승만이 짐작 못할 바도 아니었다.
가자. 너희들이 막으면 내 힘으로 갈 테다.

“나는 아직 조선호텔에 있소. 나의 도착이 발표된 이래 국민들은 야단법석인 모양이오. 날마다 수백명이 호텔 현관에 몰려와서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소. (중략) 곧 윤치영이 여기 올 것이고 여러명이 따라 올 것이오. 이들이 동대문 밖에 큰 집을 한 채 마련해 준다 하오. 공산그룹을 제외하고 김구와 임정 사람들을 데려 올 계획을 하고 있소. 여운형과 그 동생은 내가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노라 말하고 있소. (중략)
이 모든 일중에 가소로운 부분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해서 정부를 조직한 일이오. 나는 그들에게 소련이 반공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내가 공산 지도자가 되었으니 큰 영광이라고 말하였소.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이만 줄이오.“이 글은 10월21일 이승만이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보낸 편지다.그 닷새전 10월16일 이승만은 미군 군용기를 타고 김포 비행장에 내렸다.


두 번째 귀국 방해, 하지 미군정장관의 탄압

1946년 여름이 되면서 미국의 서울 특파원들은 심술궂게 조롱했다.
“북한에서 소련은 야생마로 달리고 있는데, 남한에서 미국은 호랑이 꼬리를 잡고 도망 칠 방법을 못 찾고 있네.” (로버트 올리버 책: 신비의 인물 이승만,p241)
이 비유대로 남한 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정부 정책과 남한 정치세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미국 정부 지시사항은 오로지 질서 유지와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하라는 것
뿐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강력한 반소(反蘇)노선에 부딪쳐 우왕좌왕하는 형편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위대한 정치가지만 러시아에 대한 그의 공격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어떤 형태로도 정부수립에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러시아의 협력 없이는 한국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요. 제발 당신이 이승만을 설득하여 러시아 비판을 중단시켜 줘야겠소.”
하지 장군의 초청을 받고 서울에 날아온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하지 장군은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좌우합작을 결연하게 반대하는 이승만의 입을 막아달라는 것이 올리버 교수를 초청한 목적이었다. 올리버 교수는 1942년부터 이승만의 미국망명정부격인 ‘구미위원회’ 정치고문을 맡아서 이승만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의 공보고문)이승만의 신념은 평생의 체험으로 다져진 확고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때부터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야욕은 오래된 것이라는 역사적 증거들, 현재 동구권을 점령하여 좌우합작으로 위성국을 만들어가는 것, 남한에 소련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독립을 포기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라는 것과 같다는 설명 끝에 이승만은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이제와서 개인적인 자리에 연연하여 한국을 러시아에 넘길 공모를 하라구요? 그건 노예의 길입니다. 나를 잘못 보았습니다. 소련의 침략을 막을 나라는 미국 뿐인데 이런 식이라면 미국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프란체스카 여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내가 조국을 위해 하는 일이 끝장이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시골 가서 닭장이나 돌봐야지요.”


‘좌우합작위원회’ 공동의장에 김규식과 여운형을 지명한 하지는 ‘과도입법위원회’를 구성한다며 남한 각지 대표 45명을 선출하였다. 선거 결과는 43명이 이승만과 김구 지지자들이었다. 즉각 하지는 전원을 자기 뜻대로 지명한 관선의원으로 바꿔버렸다. 이에 항의하는 이승만에게 하지는 “이승만의 권력 장악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협조안하면 파멸이 있을뿐”이라고 선언했다.
이때 김구는 “임시정부야말로 유일한 합법정부이므로 차제에 ’임시정부의 주권선언‘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은 김구가 주석인 임정이 새 정부를 장악해야 한다는 오랜 구상을 표면화 시킨 것이었다. 이승만은 원칙적으론 찬성한다면서도 그러면 미국정부는 물론 소련과도 정면대결하게 되니 고립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짓이라고 만류했다.


이승만은 12월 1일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의 미군사정부와 불가능한 협력을 추구하기보다 미국 의회와 지도층에 호소할 계획이었다. 하지는 자신을 제치고 워싱턴에 간다는 이승만에게 “충격적이오.” 라고 분노했다.
이승만이 출국하자 하지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찬성운동을 촉구했지만, 과도입법의원도 ‘신탁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안재홍은 즉각 미군정 행정관으로 발탁되었다.

하지에게 따돌림 받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우호적인 환영과 대한민국 수립 ‘6개항’ 제안도 큰 호응을 얻었다. 군정장관으로서 하지의 실패 역시 워싱턴에서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으며, 지난 2월 소련이 북한에 설치한 ‘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 단독정권이라는 인식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소련이 남한 침공목적으로 50만 북한군을 편성하고 있다는 서울의 정보가 날아들어 미국방부를 위기감에 몰아 넣었다.


1947년 3월31일 이승만은 워싱턴 수송사령부에 나가 다음날 아침8시에 출발하는 수송기를 타려고 동경까지 운임 900달러를 지불했다. 그날 저녁 국방부 차관실에서 탑승허가를 취소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승만의 귀국 허가는 미군정청 소관으로 국무부가 주선하고 국방부는 군용기를 준비하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취소 이유를 묻자 “이박사의 귀국이 사령부 군용기를 배정할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귀국취소는 국무부 고위층의 지시라고 했다. 국방부는 ‘취소 변경 불가’를 통보해왔다.
힐드링 국방차관은 유감을 표시하고, 대신 노스웨스트 항공편에 이승만과 장기영 비서 좌석을 마련했다고 알려왔다. 노스웨스트가 일본 정기노선 개설준비로 4월5일 미네아폴리스를 출발하는 시험비행 편이 있다고 했다.
하지 장군이 발행한 군정청 여행허가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한국 재입국이 허용될지도 모르는 채 이승만은 노스웨스트기를 탔다. 동경에서 상해를 경유해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기 위해 남경으로 갔다.
이승만의 귀국은 4월 중순이 지나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은 4월19일자 이승만의 편지:
“장개석 총통부처가 달려 와서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총통은 나의 서울행을 위해 착륙허가만 얻으면 자기 전용기를 제공하겠답니다. 한국에 전보를 보냈더니 하지 장군은 중국영사관을 통한 총통의 공식요청이 필요하다고 한답니다. 중국정부는 곧바로 전문을 보냈는데 이번엔 항공기 인식번호를 확인한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맥아더 장군에게 전보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후 중국 외교부의 공식 연락을 받았습니다. 21일 일요일 9시에 출발한답니다. 이제야 귀국길이 열린 것 같습니다.“가택 연금, 돈암장을 쫓겨나다

5개월 만에 서울에 돌아와 보니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 장군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보다 더 치명적인 일은 여태까지 어렵게 협조해 오던 김구가 독자 노선을 결심해버렸기 때문이다.
김구는 또 다시 ‘임시정부의 주권’을 당장 선포할 것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이미 5년전 중경 임정때 공산당 각료들을 영입한 김구는 임정이 바로 좌우연립정부이므로 미소 협의를 무시한 채 정권을 출범시켜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애국심과 용기는 추종을 불허하지만 국제정세에 너무나 무지한 김구, 한국문제가 동유럽이나 중국정세와 직결되어있는 미-소의 이해관계를 도무지 이해 못하는 김구를 달래느라 이승만은 두고 두고 진땀을 빼야했다. 한편으로 하지와의 끝없는 대결은 갈수록 파국으로 치달았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과를 기다려라, 좌우합작을 끝까지 거부하면 당신은 제거된다, 압력과 협박은 계속되었다.
서울에 날아온 소련대표 슈티코프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한국지도자들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공동위원회는 중단되었고, 회담 재개도 전망이 어두워졌다.
하지는 이승만을 가택연금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예 이승만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전화기는 철거되었고 모든 편지는 미군정의 검열을 거친 뒤에야 배달되었다.
이승만을 찾아오는 국내외 저명인사들은 미군정의 방해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주기적으로 해오던 라디오 방송도 금지되었다. 요컨대 외부 국민과의 모든 접촉수단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었다.이 때 이승만은 두 차례 암살 미수를 당하는데 운 좋게도 화를 면한다.
부엌에 설치한 시한폭탄이 폭발 직전에 발견된 것이다. 잠자다가 폭살될 뻔한 이승만. 범인을 잡고 보니 바로 돈암장 경비 경찰관이었고 공산당 프락치로 밝혀졌다.
또 한 번은 돈화문 부근에서 이승만의 차량에 누군가 권총을 쏘고 달아난 사건이다.
급기야 돈암장의 주인 측에서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가 왔다. 누구의 무슨 압력을 받은 것인가. 해방후 귀국하여 조선호텔서 잠시 머물다가 윤치영등의 주선으로 입주한 돈암장을 비워야한다면 당장 어디로 가란 말인가.

 

어렵게 구한 집은 원효로 언덕바지 조그만 일본주택이었다. 한강이 발 아래 흘러가는 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별장 ‘마포장’은 오래 비워둔 탓에 문짝이 떨어지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아 물지게로 물을 날라 청소하고 입주했지만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할 일이 없어진 이승만은 손수 망치질 하고 대패질도 하고 집을 수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너무 협소한지라 이삿짐도 다 풀지 못한 채 지내는 7순 노부부를 보다 못한 측근들이 다시 나섰다.
이승만의 열렬한 후원자 가운데 황온순 여사가 있었다. 휘경학원의 설립자이며 원불교 종사를 지낸 황여사의 집이 낙산(駱山) 아래 기와집 ‘이화장’(梨花莊)이었다.


황여사는 미국서 영화화된 유명한 ‘전송가’(Battle Hymn: 戰頌歌)의 여주인공 모델이다. 6.25 전란 중에 수많은 고아들을 거두어 돌본 고아들의 어머니, 1.4후퇴 때 이승만에 부탁하여 서울에 있던 고아 3000명을 미군 수송기로 안전한 제주도까지 후송해 키워낸 천사다. 인기스타 록 허드슨이 주연한 영화에서는 미공군 헤스(Hess)대령의 고아 수송작전등 자전적 휴머니즘이 초점이지만 진짜 숨은 주역은 황 여사다. 당시 이승만은 헤스에게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란 휘호를 선물한다.

 

1947년 가을, 황 여사가 집을 내놓고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피난살이’ 두달만에 마포장을 떠난 이화장으로 옮긴다. 첫 내각을 구성한 ‘조각당’(組閣堂)‘등 이승만의 발자취와 유물이 가득한 이화장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생생한 보물이다. 세계인들에게 내보일 만한 건국대통령 기념관은 언제 어디에 세울 것인가. 




[출처] 뉴데일리  http://biz.newdaily.co.kr/site/data/html/2010/08/12/2010081210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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