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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1편 - 이승만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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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래강님의 우남 이승만에 대한 평전입니다>


    제1편 이승만에 대한 이해

    먼저 지도 하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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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이 드시는가?

    그렇다. 기적이다!
    저 그림은 공산주의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때의 공산화 지도이다. 공산화된 나라는 25개국.
    만약 소련연방 15개국, 유고연방 3개국(이후 6개로 갈라짐)을 분리하면 총 44개국이 공산화되었다. 그 중 쿠바, 소말리아, 앙골라 등 멀리 떨어진 7개국과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중국을 빼면, 나머지 35개국이 모두 소련과 중국에 붙어있는 나라들이다. 저기에 꼬딱지만한 남한이라는 나라 하나가 달랑 붙어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봐도 기적이다.

    이 기적은 모두 이승만의 작품이다.

    수긍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인물 중 이승만처럼 오해를 받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에 대한 청소년들, 아니 제법 인생을 살았다는 사람들의 인식도 이런 식이다.

    “남들은 추위와 기아 속에서 목숨을 걸고 무장독립투쟁을 했는데, 이승만은 ‘외교독립론’같은 한가한 주장을 하면서, 독립자금이나 횡령하고 미국에서 편하게 지냈다. 해방되자 미국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어 귀국했고, 권력욕에 사로잡혀 좌우합작을 거부함으로써 한민족을 분단시켰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했지만, 독재를 하다가 4·19로 쫒겨나 하와이에서 죽었다.”

    나도 젊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해 이런저런 책과 글을 읽으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정반대였던 것이다. 저 말도 안되는 일반인들의 터무니 없는 인식은 악랄한 좌빨들의 음해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미국과 충돌했으며, 한 가닥의 희망조차 없던 암울한 상황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에는 나라집(國家)의 토대를 “자유민주 자본주의”로 하는 위대한 선택을 했고 또 전력을 기울여 지켰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미국의 코를 꿰어 한반도 현대사에 집어넣음으로써, 소련과 중공의 한반도 공산화 시도를 무산시켰다. 한 줌 밖에 안되는 국력을 가지고도 20세기의 대악당인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과 1 대 3으로 상대하여 승리했다. 외교독립론이 해방 이후에 다른 형태의 꽃으로 피어났다는 말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승만은 지주제를 타파하고, 민주교육을 장려했으며, 남녀평등을 실현했고 산업을 육성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민주선거, 의회제도, 언론자유를 지켰고, 일본에 뺏길 뻔 했던 독도를 차지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자신을 쫒아낸 학생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외교독립론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일제 하에서 독립운동은 무력투쟁론, 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 이렇게 3갈래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각각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이 대표선수였다. 물론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한 분류지만,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에 적용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김구나 공산주의 계열은 무력투쟁론, 조만식이나 김성수 등은 실력양성론에 해당될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은 옳지 않다.

    3가지 모두 옳다. 그러나 당시 급변하고 있던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나머지를 탄력있게 적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므로, “외교독립론이 가장 상위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중에 이승만을 제외한 누구도 이런 국제질서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외교독립론은 세계정세를 높은 수준에서 내려다 본 이해력과 통찰력의 소산이다.
    사실 외교독립론은 적어도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만은 그럴듯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으로 하여금 국제질서의 냉혹함과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으며, 실패가 반복되면서 그는 어떠한 명분론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는 현실적, 실리적 정치가로 성숙했다. 그 경험은 해방 이후에 그의 강고한 자기확신과 빛나는 선택과 무서운 돌파력으로 발현되었고, 그 결과가 위의 지도였던 것이다.

    조선의 독립에 있어서 “외교독립론은 실패였다” 라고 한다면 나머지 노선도 마찬가지로 실패였다. 그리고 이 모든 실패의 배경에는 냉혹한 국제질서라는게 있었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병합도, 1·2차세계대전도, 일제의 패망도, 제국주의의 해체도, 그 후 전개된 동서냉전과 6·25 전쟁도, 세계의 새 질서로 자리잡은 자유무역체제도, 모두 국제정세 또는 국제질서 속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팔레스타인은 왜 그렇게 많은 무장투쟁(테러)을 했으면서도 오랫동안 국가로서 승인받지 못했는가? 달라이 라마는 왜 수십 년째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지지국가 하나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가? 중국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에 왜 단 하나의 나라도 지원하지 않고 있는가? 터키 쿠르드족 등 세계 곳곳의 소수민족은 왜 세계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우크라이나는 왜 러시아군이 진입했는데 찍 소리도 못하고 있는가?

    정답은 국가 이기주의에 기초한 현재의 국제질서가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소민족 독립운동가들이 저 아래 눈발 날리는 일송정 푸른 솔의 만주벌판과 헐벗고 험준한 아프카니스탄의 심심산골에서, 아무리 말 달리며 빨치산 활동을 하고 제 아무리 도시에 나와 자살폭탄을 돌린다고 해도, 아니면 투쟁방식의 차이로 자기들끼리 암살과 총질을 한다고 해도, 저 높은 곳에 있는 국제질서가 승인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게 국제질서의 힘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그런데 하물며 20세기 전반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타고난 천재였던 이승만은 당시 최신학문으로 고고지성을 울리며 탄생된 국제정치학을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전공했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가 처했던 시대의 국제질서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감상적 민족주의와 닫힌 세계관을 가졌던 김구나 김일성은 절대로 이런 국제질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지만 분명히 학력과 지식의 차이였음에 틀림 없다. (사실 이건 생각보단 훨씬 중요하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세 명의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도와 세계관의 차이를 고려하면, 해방공간에서 김구가 정권을 잡지 못한 것이 남한사람들에게는 매우 다행이었고, 김일성이 정권을 잡은 것은 북한사람들에게는 최악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자꾸 얘기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고 있다. 나는 항상 이게 문제다.
    내 글의 목적은 이승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가벼운 의도였으므로 그만 하고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승만의 업적은 수 없이 많고, 나 자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그냥 일화 중심으로 내 생각을 펼쳐 보련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승만의 모든 언행을 관통하는 가장 큰 배경은 국제질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었다. “국제질서에 대한 고차원적 이해”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공산주의에 대한 고집불통의 비타협”이 곁들여져서 그의 위대한 성취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전개될 글은 짜깁기의 결정판이며, 그것은 오직 필자의 천학비재함 탓임을 미리 밝혀둔다.


     

     

  2. 제2편 - 젊은 이승만

    내용

    제2편 - 젊은 이승만 

     

    이승만은 1875년, 양녕대군의 16대손이자 6대독자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다시 일어나, 일본군함이 강화도를 포격하고 일본군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과 격전을 했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이듬해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된다.)
    부모의 꿈은 이승만을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가난한 살림에도 10년을 서당에 다녔고, 나이를 속여 13살 때부터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번번히 낙방했는데 원인은 조정의 부패 때문이었다. 그나마 1894년 유일한 희망이었던 과거제도마저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자 절망한 19세의 이승만은 서당 친구의 권유로 배제학당에 들어가게 된다.

    1894년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격변기인 해였다. 고부 민란(1.10), 김옥균 암살(2.22). 동학군 1차봉기(3.21) 및 전주성 점령(4.27), 갑오개혁(6.25). 김홍집 내각 출범(7.15), 10년간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원세개의 중국 귀국(7.18), 청일전쟁(7.25), 동학군 2차봉기(9.3), 홍범14조 제정(12.12) 등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전개된 해였다.

    학교에서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다. 입학 6개월 만에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될 정도로 영어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배제학당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그의 사상이 일대 전환을 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 선교사, 주시경 등 한글학자, 이충구 등 개화당 청년들, 10년 전의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 등인데, 그들과 어울리면서 이승만은 점차 열혈청년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평등하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도 갖는다는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감동을 받은 이승만은 중대결심을 했다. 조상(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가 위패 앞에 엎드려 “시대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선고식을 하고는 미국인 집으로 가서 상투를 잘랐던 것이다. 개화파 청년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바뀐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도 발간했다. 물론 직접 기자’(記者)를 하기도 했다.(기자라는 단어도 이승만이 최초로 썼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대가로 요동반도를 빼앗았지만, 이듬해인 1895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간섭으로 다시 돌려주게 되자, 조정에는 친러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려고 1895년 10월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전국에서 백성들과 의병이 일어났고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

    1895년 11월, 이도철 등의 군인들이 춘생문을 통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처형 당하자, 이승만은 선교사와 누나 집으로 몸을 피해 다녔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군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에 따라(아관파천) 친러·친미 내각이 들어서자, 이승만도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은 대신들과 주한외교사절들도 참석한 거창한 행사였는데 이승만은 졸업생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의 영어연설을 했다.

    졸업 후 이승만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국민계몽에 나서는 한편 서재필·이상재·남궁억·윤치호같은 개화파들과 결성한 급진적 단체 ‘독립협회’에서 배재학당 학생들과 함께 행동대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가 부산 앞바다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하려고 하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와 같은 군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개혁 압력을 넣었다.

    1898년 3월, 제1차 ‘만민공동회의’가 열렸을 때 이승만은 총대의원으로서 가두연설과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다. 화가 난 고종이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제 도입 역적모의” 혐의로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고, 이상재·남궁억 등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밤을 새워가며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석방과 개화파 민영환을 위주로 한 새 내각을 구성하는 유화책을 썼지만, 이승만 등의 과격파는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고종은, 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의회’와 유사하게 운영하겠다며,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협회에 줬고,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23세의 이승만도 종9품 의관이 되었다.
    일본은 이들 개화파 민선 의관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본에 망명했던 친일파 청년들을 이승만에게 접근시켰다. 이승만도 일본의 문명개화에 호감이 있던 때라 그들을 만났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일본은 미·러와 전쟁해서 거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고대하던 중추원이 열리고 이승만이 “개화파 사면 및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자 고종은 격분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역적이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승만 주장의 배경에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역적모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1898년 12월 중추원을 해산함과 동시에 독립협회 측 의관들에 대한 체포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도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몰래 반입한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여 탈출까지 했었지만, 곧 다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다.

    감옥 내 정치범 중에는 배재 동문인 신흥우를 비롯해 이상재·이원긍·이준·양기탁과 같은 독립협회 동지들이 있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던 박용만도 있었고,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도 있었다. 이승만은 박용만, 유성준과 가까이 지냈다.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이승만은 전근대적이었던 조선 말의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7개월동안 손·발에 족쇄를 채우고 목에 10kg의 나무칼을 쓴 채 앉아서 잤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동료 수감자로 하여금 대신 책장을 넘기게 하여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는 버릇은 그 때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다. 그렇게 6년 이상의 수감생활을 하면서 유럽사와 영어를 공부했고, 영어사전을 집필했고(중단됨), ‘독립정신’과 ‘옥중잡기’란 책도 썼다.

    ‘독립정신’은 급변하던 당시 세계정세와 열강들의 속셈을 분석한 다음, 대한제국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토대를 한 미국식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군주제와 신분제를 부정한 대반역적 내용이었다.(다만 위험 회피를 위해 입헌군주제가 적합하다고 결론을 냈지만 이미 그는 공화주의자가 되어있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과격한 행동(임오군란, 동학란)이 외국군을 끌어들여 국토를 초토화시켰다”며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비판했고, “노쇠하고 무능하고 사악한 중국(청)이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의 12년 동안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의 개화를 막았다”고 분개했다. “고립되면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수 없으니 세계와 교류해야 한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배우게 해야 한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세계화, 근대화, 선진화를 주장했다.

    그 때가 1904년이고 그가 29세였음을 감안하면, 그리고 당시 조선의 집단적 지식수준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내용이다. 왕은 갈피를 못 잡고, 국모(國母)는 몇 달이 멀다하고 굿판을 벌이며 국고를 탕진하고, 대신들은 청·러·일·미로 나뉘어 싸움질만 하고, 전국의 양반들은 성리학 원리주의에 빠져 허공을 헤매고, 한 해에도 몇 번씩 민란이 일어나던 구한말에, 이승만은 벌써 공화정을 주장했고 동북아 국제질서를 이해했고 세계화를 주장했다. 그 때 조선이 얼마나 형편 없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같은 해인 1904년,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크렙스트가 조선의 형벌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종로1가 전옥서를 찾았다. 당시 전옥서 책임자는 이 서양인의 몸에 “뿔이 없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했다. 당시 전옥서 책임자라면 요즘 서울형무소 소장이니 중앙부처 국장급이다. 중앙부처 국장급 고위관료가 서양인의 몸에는 뿔이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그 때였다. 그만큼 조선의 지성과 세계관은 형편 없었다. (그러고보니 조선이 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빨리 망해야 역사의 순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젊은 이승만이 저런 글을 쓴 것이다.

    이처럼 당시 이승만은 실천적 급진주의자였다. 4·19로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그가 학생들에게 했다는 말, 즉 “불의를 보고 젊은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희망이 없다”라는 말에는, 젊은 시절 그의 급진적 개혁성향을 고려해볼 때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 말을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 때의 급진적 개혁투쟁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승만의 전기를 쓰고자 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한말 조선의 사정과 그의 젊은 시절을 길게 얘기한 이유는, 그의 일생을 이끌었던 신념이 그 때의 정치적, 국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번 형성된 가치관을 그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고, 우리는 그 혜택을 받고 있다. 


  3. 제3편 - 예언자 이승만

    내용
    제3편 - 예언자 이승만

    나중에 닉슨 등의 회고에서도 나타나지만 이승만은 급변하고 복잡하던 당시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예지력에 근거한 협상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그런 찬사를 증거하는 예는 그의 일생에서 자주 확인된다. 여기서는 우선 그가 했다는 유명한 예언 2개만 보자.

    1923년, 그러니까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한지 불과 6년만에 이승만은 하와이의“태평양잡지”에 공산주의의 추락을 예언한 논문을 기고한다. 공산주의 추락의 이유로 이승만은 재산의 균등분배와 무경쟁사회 추구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70년 후 공산주의가 붕괴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시 세계의 누가 그런 예언을 했던가? 오히려 공산혁명이 현실세계에서 성공하자, 세계의 지식인들은“공산주의야말로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상이며 공산주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을 때였다. 많은 나라의 리더들이 소련의 혁명에 고무되어 자신의 고국에서 공산혁명의 꿈을 추구하던 때였다.

    그 이후 많은 공산주의 혁명이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했지만, 결국 성공한 리더들조차 거의 예외 없이 미증유의 홀로코스트를 만들었다.(총 1억명 이상을 죽였다고 들었다). 인권탄압과 가난은 그대로 남았으며, 공산주의 국가들은 70년이 지나자 모두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1억명을 죽였고 무엇 때문에 혁명을 했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미 1923년도에 공산주의의 멸망을 예언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그의 유명한 예언은 태평양전쟁을 예언한 것이다. 이승만은 1930~1940 년대에 미국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친일 분위기를 반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야망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1940년 1년 동안 집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니 미국은 미리 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미국인들은“전쟁 도발을 부추기는 망발"이라며 혹평을 했다. 작가 펄 벅 여사만이“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진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는 서평을 썼다.

    하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폭격했고, 미·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일본내막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예언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덕분에 이승만의 인지도가 크게 상승했다. 역시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다. (펄 벅은‘대지’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최초의 여성이다.)

     


  4. 제4편 - 외교독립론에 몸을 바치다

    내용

    제4편 -  외교독립론에 몸을 바치다.


    외교독립론 얘기를 해 보자.

    외교독립론은, 외교를 중시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조선의 독립 또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무장투쟁론과 대비된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외교독립론을 현실도피를 위한 핑계라고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은 국내 곳곳에서 레지스탕스가 준동하고, 조선 독립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국내로 일제히 진격하는 장면을 꿈꾼다.

    아니면 적어도 소련과 미국의 정복에 대항했던 아프카니스탄처럼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하여, 일본이 진저리를 치도록 했기를 상상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나는 피사로가 겨우 186명의 군인과 13자루의 소총으로 20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잉카제국을 정복했다는 글을 읽고 실소했던 기억이 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그 때 나는 “참, X신같은 놈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나중에 원세개의 병력이 3,000 명 뿐이었다는 글을 읽고나서 잉카와 아즈텍 왕을 비웃었던 게 미안했다. 사돈 남 말 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어릴 때의 일이겠지만, 원세개는 불과 3,000 명의 병력을 가지고 조선의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10년 이상 좌지우지 했다. 20여 세 밖에 안된 놈이 고종 면전에 대고 “너같은 혼왕(혼미한 왕)은 당장 폐위시켜도 시원치 않다”고 협박하고,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조약 서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는 내용을 넣고, “조선은 외교에 대한 일체를 청에 문의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안동김씨 양반 딸들을 첩으로 삼고, 청군으로 하여금 부녀자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게 했다.

    2,000만 명의 인구(맞나?)를 가진 국가가 3,000 명을 제압하지 못해 저런 치욕을 당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은 완전하게 오합지졸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은 빨리 개혁개방을 하던지 아니면 빨리 망해야 옳았다.(지금의 북한과 비교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종과 민비를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김옥균, 박영효, 이승만 등 개화파들의 목숨을 건 근대화, 개방화 주장을 100번 지지한다.(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도 청군의 반이 본국으로 돌아간 기회를 노려 감행했다. 베트남에 프랑스가 상륙하자, 베트남을 자기 속방이라고 생각해왔던 청이 프랑스를 혼내 주려고 청군 1,500 명을 베트남으로 빼돌렸기에 감행할 수 있었다. 물론 청은 프랑스에게 개피를 봤다.)


    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엄연히 황제도 있던 조선 말에도 이랬는데, 둘 다가 없던 식민지 하에서 독자적인 무력으로 독립을 한다는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조선 병합은 당시 국제열강이 승인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조선병합을 보는 제1원칙은 이것이 국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국제질서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잊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일제는 1930년대부터는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 행정력으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 동남아 전체를 석권하고 호주까지 넘보던 강대국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또 민족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무장독립운동은 씨가 마른 상태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미 일제의 충실한 신민이 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국내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의 희망을 접고 변절한 상태였다. 김구의 임시정부 본거지조차 일본군을 피해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집세를 내지 못해 장개석이 주는 자금에 목줄을 매고 있을 때였다.

    피지배국 조선의 국내 치안도 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일제시대 조선에 있던 일본인은 최대 75만명(총인구의 2.7%)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대부분이 도시와 항구에 살았고, 시골 면소재지로 가면 주재소 순사, 소학교 교장과 교사, 수리조합 및 금융조합 직원 등 총 5~6 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총독부의 지배체제는 강건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조선인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조선인들 중 일제에 대한 자발적 협조자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요 이유는, 적어도 백성들 입장에서는 조선 말의 저 엉망인 시스템보다 일제의 통치 시스템이 더 좋았다는 데 있다. 그만큼 조선 말 나라의 사정은 개판이었다.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독립이란 없었다. 조선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영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해체를 조건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승리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독립을 이룰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 나라도 없었다.

    제국주의 해체는 인류사에 있어 미국의 절대적 공헌임에는 틀림 없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첫째는 당시 세계의 첨단을 가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전근대적 가치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다 중요한 이유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당시의 국제질서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자체가 워낙 땅 덩어리가 크고 경제적으로도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어, 골치 아프게 걸핏하면 저항하는 식미지로부터 원료를 뺏고 상품을 강매하는 시스템보다는 세계를 개방시장으로 하여 자유무역을 하는 편이 미국의 이익에 맞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2차대전 후의 제국주의 해체와 80여 개 독립국의 탄생은 모두 제국주의가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피지배국 독립운동의 힘만으로는 독립한 나라는 없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무슨 우리 힘만으로 무장투쟁을 해서 독립을 쟁취한단 말인가?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공산주의 투쟁을 국제질서 측면에서 보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1941년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 하에 두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뒤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거나 한·미를 이간질했다. 해방이 되자 갑자기 김구를 환대하고 막대한 돈도 주었다. 왜 그랬을까? 김구의 임시정부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거나 아니면 해방된 한국에서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도록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숨은 목적이 있었다. 이게 바로 장개석판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는데 김구가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바르게 대응했을까?

    만주 공산주의 혁명 투쟁이나 6·25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에서의 독립군 대량 학살(자유시 참변) 배경에는 만주의 한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스탈린의 속셈이 있었다. 모택동이 조선족 공산주의자들과 항복했던 장개석의 국민당군 출신들을 6.25에 대거 투입한 배경에도 골치 아픈 국민당 잔당들과 조선족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모택동의 속셈이 있었다. 물론 장래의 라이벌 중국의 희생을 유도하려는 스탈린의 속셈도 있었다. 마치 2차대전 때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폴란드 ‘카틴 숲 대학살’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 스탈린판 또는 모택동판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는데 김일성이 이런 배경을 이해했을까?

    나는 김구나 김일성이 이런 국제질서의 음흉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김구의 중국 임시정부도, 김일성의 만주 공산주의 혁명투쟁도, 모두 장개석판, 모택동판, 스탈린판 동아시아 국제질서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처럼 공허한 성리학적 명분이나 김일성처럼 개인적 권력욕에 집착하면 이렇게 민족 전체가 크게 당하게 되어 있다. 국제질서를 깰 생각은 못하고 맨날 소총 들고 설쳐봐야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깨알 백 번 굴러봐야 호박 한 번 구르느니만 못한 것이다.

    일제 40년간 조선을 지배한 나라는 물론 일제지만, 일제를 지탱하게 한 것은 국제질서였고, 당시 국제질서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였다. 이미 제국들 간의 흥정으로 자기들의 나와바리가 정해진 상태였다. 아시아만 보더라도 조선과 대만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중국은 영국과 포르투갈과 독일과 러시아가,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가 먹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국제질서가 그랬었고 거기에 조선이란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의 티벳이나 신장위그루보다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 국제질서 속에서는, 조선은 그냥 일본의 영토였고 조선 민중은 그냥 일본의 국민이었다. 이 국제질서는 한 두 명의 일제 공무원이 독립군 총에 맞아 죽는다고 깨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제국끼리 전쟁해서 한 쪽이 죽어야만 깨진다. 지배국에 반대편에 서 있는 나라 국민들의 환심을 사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에 붙어 조금이라도 도와줌으로써, 나중에 발언권도 얻고 국제질서의 승인을 받는 것,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최소한 전략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다.

    무장투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국제질서를 고려하면서 신축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지금 달라이 라마가 티벳 독립을 위해 오직 무장투쟁만을 한다면, 그것이 티벳 독립이나 티벳 국민들의 행복에 과연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얘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조선 500년간의 중국에 대한 “책봉과 조공” 역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으며, 조선은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에 보내는 조선 왕의 문서 끝에는 “신(臣) 김개똥”이란 글자가 들어갔다. 이것을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시의 국제질서가 그랬기 때문이고 그 질서를 준수하는게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미·일 등과 조약을 맺을 때, 문서에 “상국(上國) 청(淸)”이란 말도 적으려고 고집해서 상대국이 난감해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물론 고종의 저런 자세는 당시 쇠퇴하는 청나라와 서세동점 등 급변하던 국제질서를 인식하지 못한 바보 짓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고종을 아주 싫어했다.) 국제질서란 이렇게 무섭고 막강한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 이런 국제질서의 본질을 궤뚫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국제정치학박사 이승만이었다. 실제 제국주의 국제질서는 1,2차대전과 국제연맹, 국제연합 등을 거치면서 깨지고 있었고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벽같은 국제질서에 수십년 동안 부딪혔고,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국제연맹 총회나 군축회담에 가서 홍보하고 설득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친분과 명성을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 선교사, 언론인, 일반인을 상대로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썼다. 전승국이 될 미국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일제타도 구호인데다가, 근대적 서양화를 급속히 추진하고 있던 일본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호감을 고려할 때, 그리고 1차대전 승전국인 미·영·프의 동맹국이 일본임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국제질서의 높은 벽을 느꼈고 깊이 좌절하기도 했다.가장 높은 곳에서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 아래 산 속에서 무장투쟁만을 주장하는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닫힌 사고에 빠져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 영토 내에서 무장훈련을 시키는 박용만과 친일파 미국인 D.화이트 스티븐슨을 암살한 장인환 의사를 비판했다.

    어느 나라든지 총 들고 들어오는 외국인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는다. 동맹국인 일본을 테러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미국에서 무장훈련을 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겠는가?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무장해제 당하고 모조리 학살당했던 “자유시 참변”도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당시 러·일 관계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러·일 관계 자체가 이미 국제질서의 영역이다.) 국제질서에 무지하면 이렇게 당하는 것이다.

    장인환 의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미국 현직 대통령(T.루즈벨트)의 절친한 친구인 스티븐슨을 총으로 암살한 것을 당시 미국인들이 지지했겠는가? 잘 해봐야 “조선인은 테러를 좋아하는 민족”이란 인상만 심어줄 것이 뻔했다. 실제로 그 다음 해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암살 당하자 미국인들은 조선인들을 테러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하버드대 지도교수는 이승만의 석사학위 논문심사를 거절하여 이승만은 하버드대를 떠나야만 했다.

    21세기인 지금도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로 각인되어 있는데, 100년 전이야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승만의 박용만, 장인환 비판은 미국여론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국제질서는 견고했고 냉혹했다. 이승만은 오직 국제질서가 임시정부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주기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 어느 나라도 이를 승인하거나 임시정부의 독자적인 군사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임시정부 자체가 이념이나 노선 차이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에 국제적으로 대표성도 없었다.


    이승만이 1939년 8월,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모두 국제정세에 무지몽매함을 개탄”한 다음, “중국이 아무리 피를 흘리며 일제와 싸운다고 해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니, 미국 국민의 동정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개석에게 알려 주라”고까지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국제질서에 통찰력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5. 제5편 - 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과 무장투쟁론도 주장했다

    내용
    제5편- 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과 무장투쟁론도 주장했다

    외교독립론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만이 국민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노력을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면서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 지리 등 민족교육을 시켰다. 학교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감리교 본부가 한인·중국인·일본인 학생들을 구분하지 않고 교육시킴으로써 보통의 미국시민을 육성하려고 하자, 본인이 기독교도임에도 이승만은 과감하게 감리교 선교부와 손을 끊었다. 감리교 교육방침을 받아들이면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역사 교육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를 갖춘 ‘한인기독학원’을 세웠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다. 당시 한인소녀들은 전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학교를 남녀공학으로 했다. 그는 벌써 남녀평등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정 문제가 복잡하게 돌아갔고, 그래서 이승만이 학교 운영자금을 횡령했느니 하는 말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당시 미국의 재산권과 교육제도 즉, 민법과 교육법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입장이 안된다. 예를 들어 교육법 등이 바뀌면서 이승만이 운영했던 한인학교 졸업생은 정규학교 졸업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위기같은 것이 있었는데,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이승만은 기차표 한 장까지 일일이 모으고 기록했을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가 죽은 후 축재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운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싸움과 법정다툼은 대개가 모함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증 중의 하나로 인천의 인하대학교가 이승만이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돈을 종자돈으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와이 교포들과 국내유지들의 성금, 그리고 국고보조 등도 있었다.) 인천은 하와이 교포 1세들이 이민갈 때 떠났던 항구인데, 인하대학교라는 이름도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무장투쟁론도 그렇다.
    이승만이 줄곧 무장투쟁론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때가 되자 이승만은 무장투쟁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 때란 바로 미·일 간의 전쟁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추구한다. 중경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구의 임시정부도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관계가 좋아진 임시정부에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도록 하고,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오도록 했다. 이승만은 그 성명서를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에게 제출했지만,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미국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뛰었다. 당시 미국에는 적성국 식민지 국민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주는 ‘무기대여법’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 법에 근거하여 무기를 달라고 미국정부를 설득했다. 한국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일본 패망 뒤에는 소련의 한반도 점령(공산화)을 막을 수가 있어 일거양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간첩인 앨저 히스같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정부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어 역시 실패했다.

    당시 미국정부에는 소련간첩 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할 때였기 때문인데, 국무부에는 특별정치국장 앨저 히스를 비롯해 극동정치국장 존 카터 빈센트, 핼도어 핸슨, 존 스튜어트 서비스, 올리버 에드워드 클라브, 한국문제 담당관 조지 맥퀸 등이 있었고, 재무부에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있었다.

    앨저 히스는 나중에 얄타 회담과 유엔 창립총회를 주도했던 F.루즈벨트의 최측근이었고,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케인즈와 더불어 브레튼우즈 협정과 IMF를 주도적으로 만든 인물이다. 2차대전 후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 역역의 국제질서 축 2개를 만든 자들이 좌빨이었던 것이다. 이는 2차대전 전후 미·소협상 때마다 미국이 소련에게 양보했던 것, 해방 전 이승만이 미국정부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던 것, 해방 후 남북합작 문제 등에서 이승만이 악전고투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승만을 만난 앨저 히스는 나찌와 싸우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 소련을 비난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며 화를 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전후 국제문제를 처리하려는 좌우합작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동구와 발칸반도가 공산화되거나, 루즈벨트가 장개석에게 압력을 넣어 모택동과 국공합작을 하도록 만든 것이나, 이의 영향과 장개석 정부의 압력을 받아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가 1942년 김규식·김원봉 등 공산주의자들과 손 잡고 좌우합작 체제로 바뀌었던 것도 모두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면 국제질서라는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건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2차대전 전후 소련의 급팽창 또는 세계적인 공산화 현상은 미국의 좌우합작 전략에 근본원인이 있었고, 이런 전략의 배후에는 미국정부에서 암약하는 좌빨들이 있었다. 이런 막강한 국제질서에 성공적으로 저항하거나 이를 역이용하여 성공한 세계 유일의 신생국 지도자가 이승만이었던 셈인데, 이승만은 “좌우합작 = 공산화” 라고 철석같이 믿어 이를 본능적으로 거부했기에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이후 많은 사례에서 확인된다.
    이승만은 과거에 알고있던 미 육군전략국(OSS) 소속 프레스턴 굿펠로우 대령을 찾아갔다. 굿펠로우는 대일전에 한국인들을 활용하라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한인청년들을 훈련시킨 후, 일본이나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활동과 파괴활동을 벌이게 할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장석윤을 비롯한 19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선발되어 1942년 12월 4일부터 샌프랜시스코 연안의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무선·폭파·촬영·낙하산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그들은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렸지만, 중국전구의 웨드마이어, 태평양지역의 맥아더, 태평양지역 해군사령관 니밋츠는 냅코작전이 기존의 전투력을 분산시킨다는 이유로 승인을 꺼렸고, 그러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했다.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씨도 냅코 프로젝트 특공대원이었다.)

    이승만은 국회 설득에도 나섰다. 친한 변호사나 기자들을 대동하고 상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미 국무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성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국교포들을 적국민으로 대우하지 말라”며 미 법무부에 냈던 청원이 1942년 2월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미국인들도 일본에 적의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정부의 대일본 여론조작도 작용했다. F.루스벨트는 1942년 2월 포고령을 발동하여, 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는 재미 일본인들을,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륙 등 격리된 지역에 만든 ‘재정착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 수용했다. 이 때문에 종전 후에도 미국은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한국인이라는 국적이 없었던 재미교포들도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차별대우를 받았었는데, 이승만이 해결했던 것이다. 분명히 미국인들의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6. 제6편 - 임시정부, 미국정부, 재미동포와의 끝없는 갈등

    내용

    제6편 - 임시정부, 미국정부, 재미동포와의 끝없는 갈등 

     

    [내가 이 글을 쓰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과 죽이 잘 맞아 서로 짝짜쿵해서 이승만이 집권했다는, 그야말로 사실과는 정반대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믿는 주변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얼마 전 이 방에서도 그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당초에는 이승만과 미국정부, 이승만과 한국인들(재미교포 및 임시정부)과의 갈등사례 위주의 글만 써서 반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주변의 갈등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갈등부분만 골라 따로 적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내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글에서도 상당한 갈등이 기술되었지만, 이제부터 당분간은 미국을 포함한 주변과의 갈등사례를 중심으로 써 보겠다.
    오늘이 노동절이다. 갑자기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갔을 때, 노동절을 맞아 북한군의 사열을 받았던 장면이 떠 오른다. 이 내용은 나중에 쓸 것이다.]

    해방 이후 나라집 세우기 과정과 6·25 과정도 마찬가지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은 미국정부, 재미동포, 임시정부와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정부, 재미동포,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좌우합작 불가’ 신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와의 갈등에는 미국의 전략에 대한 이승만의 반발이 더해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 3그룹과의 갈등은 주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본능적인 거부 때문에 발생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승만은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이 장에서는 그 때문에 이승만이 얼마나 많은 그룹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었는지를 살펴보자.

    3.1운동 직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발족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의 노령임시정부(3월21일), 중국 상해임시정부(4월 11일), 한국 한성임시정부(4월23일)가 그것이다.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도 있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와 신한민국정부도 발족됐으나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승만은, 노령임정에서는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 이어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해임정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사실상의 수반인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한성임정에서도 사실상 최고자리인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모두 이승만이 미국에 있을 때였기에 이승만 자신도 추대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벌써부터 그의 이름값은 컸다. (이는 해방 후 여운형·박헌영이 주도했던 ‘조선인민공화국’에서도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한민당’에서도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승만이 모두 거부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임정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왜냐하면 다른 임정에 비해 한성임정은 1919년 4월 16일∼23일에 전국 각지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국민대회를 여는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고, 탄탄한 조직을 가진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됐으며, 주로 이규갑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그 배후에는 이승만을 아들처럼 아끼던 이상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상해에서는 3개의 임정을 통합하자는 운동이 벌어져,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한성임정 조직을 중추로 해서 상해임정과 노령임정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졌다. 임시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임명되었다. 박용만은 외무총장이 되었지만 이승만과는 일하지 않겠다며 취임을 거절했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에, 김구는 경무국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각료 선정에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1919년 11월에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상해에 오면서 통합임시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상해와의 전문을 통해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어렵게 출발한 통합임정은 온갖 분파들의 정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기호파와 서북(평안도)파, 무력투쟁론과 외교투쟁론, 미국중심과 중·러중심,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노장파와 소장파 등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반목을 일삼았다.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아예 북경으로 가서 반임정투쟁을 벌였다. 통합과정에서 법통은 한성정부를 이어받고 임정 위치는 상해로 정해진 데 반발해, 노령임정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임시대통령이 현지로 부임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게 일자, 이승만은 비서인 임병직과 함께 상해에 가기로 했다.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려 있어 비밀을 유지해야 했기에, 하와이에서 두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배를 찾기 위해 미국인 친구 윌리엄 보스윅의 별장에서 한 달 이상을 보냈다. 당시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거의 모두가 일본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1920년 11월 15일 저녁, 두 사람은 보스윅의 도움으로 배표도 없이, 중국 직행 선박이자 중국인 노무자들의 시체를 싣고 상해로 가는 배(웨스트 하이카호)에 올랐다. 사전에 보스윅과 선장 사이에 몰래 태워도 좋다는 양해가 있었다. 이승만은 갑판 아래 시신창고에 숨어들었는데,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다가 시체 썪는 냄새까지 지독했다.
    배가 항구를 멀리 벗어난 다음 날 늦은 밤에야 두 사람은 선장에게 갔다. 선장은 모르는 척하고 야단을 친 다음, 무임승선을 대신해서 노동을 명령했다. 젊은 임병직은 갑판청소를, 나이 든 이승만은 하루 4시간씩 망 보는 일을 맡았다. 배는 마닐라를 거처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 속에 끼어 통나무를 메고 육지에 상륙했다.

    1920년 12월 28일부터 5개월간 이승만은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무를 했다. 임정은 재정적으로도 궁핍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이념 등으로 갈라져 격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어 이승만은 매우 힘들어 했다. 무력투쟁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 이동휘와 신채호의 비난, 비호의적인 안창호의 평안도 세력, 게다가 이승만을 살해하기 위해 김원봉의 의열단이 파견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신채호는 1차대전 종전 후의 질서를 정하는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글 몇 줄 적은 문서를 제출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주장이었다. 안창호는 상해에서 서북지방 출신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컸다.

    함경도 출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 임정을 시베리아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이승만 퇴진운동도 벌였다.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내놓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학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했다. 그러자 임정세력들은 이번에는 이승만의 포용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군중대회를 열고, 미국에 의존하려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이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무장투쟁론이 우세했다. 애초에 상해에는 일체의 조직이 없었던 이승만으로서는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박용만·신채호 등 무장투쟁파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위임통치 청원문제(3·1운동 전인 2월 25일, 정한경·이승만이 조선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일)로 이승만을 규탄하고는 상해임정도 부인했다. 그리고 상해 의정원을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새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안했다.
    이들은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국내외 61개 단체가 참석해 국민대표회를 열지만, 좌익과 우익, 좌익 내 고려공산당과 전러공산당 등이 갈등을 빚다가 안창호계는 탈퇴하고, 급진파만으로 조선공화국을 선포한다.

    이승만이 보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지나칠 정도로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명분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직도 없는데다가 미국식 자유주의적·실용주의적 풍토에서 교육받고 미국적 가치와 생활방식을 체득한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상해 임정은 파탄을 향해 달려갔고 이승만은 진저리를 쳤다.
    이승만은 더 이상 상해에 있을 필요를 못 느꼈다. 마침 미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태평양 지역 9개국에게 해군 군비축소회담을 제의하자, 이승만은 9개국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해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상해에서 조직이 없어서 받았던 고통스러웠던 경험의 산물이었다.

    극에 달했던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고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상해임정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졌다. 그래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토의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17일, 17명의 참석의원 중 반대의원 5명이 퇴장한 가운데 12대 0으로 불신임안은 가결되었고,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임정에는 불신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상해로 보내던 하와이교민단의 인구세를 더 이상 보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이에 임정은 이승만에게 불법적 행위를 중지하라고 경고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극동에 있는 교민들로부터는 한 푼도 걷지 못하면서, 미주교민에 대해서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그동안은 자신이 임정대통령이니까 미주동포의 돈이 상해로 간 것이지, 자신을 쫓아내면 더 이상 미주동포의 돈이 상해로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마침내 임정은 1924년 가을, 이승만에게 면직결정을 통보하고 불복하는 경우에는 2개월 내에 제소하라고 통고했다. 5년 6개월에 걸친 이승만의 상해임정 대통령 시절은 이렇게 파국으로 끝났다.

    2차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다가오자 1945년 2월, 미국 대통령 F.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소련 최고인민위원 요시프 스탈린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크림반도 얄타에서 종전 후의 대책을 합의하였다. 이른바 얄타회담이다.
    “독일을 4개국이 분할점령한다, 전범들을 뉘른베르크의 국제재판에 회부한다, 해방되는 민족은 모든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 자유선거로 정부를 수립한다, UN을 창설한다”는 등의 합의가 있었다.
    또한 폴란드 처리 문제를 놓고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미·영과, 폴란드 공산당인 인민해방위원회를 지지하는 소련 사이의 심각한 갈등 끝에, 폴란드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기로, 즉 좌우합작을 하기로 합의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는 결국 폴란드의 공산화로 귀결되었다.)
    극동문제에 관해서는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내에 대일전에 참전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러일전쟁에서 잃은 소련 영토의 반환”을 약속했다.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바햐흐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얄타회담을 예의주시하면서 강대국 간의 음모와 거래로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해 줄 것이고 그래서 한반도에 소련군이 들어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이 독립한다고 해도 결국은 공산화될 것이 뻔했다. 이승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는 것이 급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임정을 승인만 해주면, 나중에 해방되었을 때 연합국 감시 하의 자유선거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과 함께, 임정 승인요청 서한을 루스벨트에게 보냈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승만은 1945년 봄 배포한 소책자 “한국 사정”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소련이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한국과 같은 약소민족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다”라고 비판했다. T.루즈벨트가 1905년 태프트-가츠라 밀약으로 필리핀을 먹는 대신 조선을 일본에 넘긴 사례의 재판을 우려했던 이승만표 통찰력의 작동이었다. 이런 우려는 몇 달 후 있었던 UN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의 폭탄선언으로 나타난다.

    1945년 4월, 연합국은 전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UN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UN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연합국들의 확실한 보장을 받으려고 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데 있어 소련의 대일전 참여와 협조가 절실한 입장이었다. 미군의 희생도 줄이고 전후 세계질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미 국무부에는 좌빨들이 암약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기본방침은 좌우합작일 수 밖에 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미국은 어리석게도 1948년까지도 이런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구라파와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반도에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려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 쯤 되어서야, 미국은 이승만의 좌우합작 거부노선에 동조했고,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에게는 좌우합작이란 곧 공산화였기에 이승만은 미국과 대립했다. 반면 김구의 임시정부는 이미 좌우합작을 하고 있었다. 미국 내 교포들도 좌우합작이 대세였다. 그들에게는 독립 이후의 나라가 어떻게 되든 당장 눈 앞의 독립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UN창립총회가 열릴 때 쯤,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미국교포들은 “이승만은 한국인의 대변자가 아니다”라고 음해하고 다녔다. 특히 조선민족혁명 노선을 따랐던 한길수는 미 국무부에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인물이며, 중경 임시정부는 몇 안 되는 늙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헐뜯었다.
    일제패망이 다가오자 분열되었던 미국 내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는 했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동지회’를 포함한 9개의 한인단체들이 ‘재미 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승만은 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 인사문제로 비롯된 갈등 끝에, ‘대한인동지회’가 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중경의 임시정부마저 이승만을 지지하자, 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기도 했다.

    드디어 워싱턴에서는, 교포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별도의 조직을 가지고 따로 따로 미국정부를 상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는 중경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한족연합위원회’는 자기들 임의대로, 앞에 언급한 한길수는 ‘중한민중동맹단’의 외교대표와 ‘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의 외교대표로서 각각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 국무부에 있는 좌빨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이승만이나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는데 이용했다. 그래서 UN창립총회 전인 1945년 4월, 이승만은 UN총회 사무총장인 앨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유엔 창립 총회장에서 미국이 소련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이유를 눈치 챘다. 영국의 처칠이 미군과 영국군의 발칸반도 상륙을 끈질기게 주장했는데도, 루스벨트가 끝까지 거부한 사실에서도 이런 유추가 가능했다. 처칠은 발칸반도의 나찌 잔당을 몰아내고 아울러 발칸반도에 대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안한 것인데, 루스벨트가 거부했다는 것은 미국이 발칸반도를 소련에게 넘겨 줄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 마침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이 미국에 나타났다. 그는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UN창립총회가 한창 진행 중인 5월 22일에 한인 지도자들을 위한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송자문의 의도에 불만을 가졌던 이승만은 항의 표시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다른 단체들이 참석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송자문은 장개석의 좌우 국공합작을 추진하여 중국을 공산화시킨 X신이다.)
    그 바람에 다시 한인단체가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표단, 김원용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단 등 3개로 분열되었다. 미국정부와의 관계에서 볼 때는 좌우합작을 거부하는 이승만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전술했듯이 이승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승만은 1945년 5월 14일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어느 소련인 망명객으로부터 들었다며, “유엔창립총회가 한국인 대표단의 참석을 거부한 이유는,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기기로 비밀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른바 얄타 밀약설 폭로였다. 유엔총회 회의장은 발칵 뒤집혔고 미 국무부는 즉각 부인했다.
    이승만 발언의 파장은 영국에까지 미쳐, 하원에서 의원들로부터 사실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왔고, 처칠은 “얄타에서 비밀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대체적인 양해가 이루어진 것들은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바로 그 ‘대체적인 양해’ 속에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밀약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폭로가 전적으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저절로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2일부터 소련군이 한반도 북한지역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F.루즈벨트가 한반도를 전부 소련에 넘겨준다고 밀약했다는 폭로는 틀렸다. 결론적으로 반 쯤 맞은 폭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대일전에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전세계적인 좌우합작 정책을 유지했는데, 중국에서 미국의 정책에 동조한 사람이 장개석의 처남이자 외교부장인 송자문이었다. 그는 소련 및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던 기회주의자로 모택동과의 좌우합작을 성사시켰는데, 결국 이게 중국 공산화의 원인이 되었다.
    송자문은 한국이 독립될 경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좌파 인물들이 집권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42년에는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미끼로 김구에게 김규식, 김원봉 같은 좌파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결과 임시정부가 ‘좌우합작’ 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크게 분개하여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송자문은 미국정부에게는 “중경 임시정부는 너무 분열이 심하고 허약해서 국제적 승인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1943년 여름, 이승만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보고서”를 F.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그 보고서를 마침 미국을 방문 중이던 송자문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송자문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이 너무 심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막기도 했었다.
    중국은 겉으로는 한국인들을 도우면서도 속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방해했던 것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한국을 중국의 속방으로 생각해 왔고, 그 생각은 제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는 말인데, 장개석 정부가 수 십년 동안이나 자기 영토 안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것 역시 당시의 동아시아판 국제질서였던 것이다.
    요컨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이나 국제기구의 승인이 실패한 이유는, 첫째 대일전과 전후질서에서 소련의 협조를 얻기 위한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 둘째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셋째 미국무부나 중국 국민당 내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3중고 속에서 이승만은 해방 후 한반도의 미래까지 내다보며 외롭게 부딪혔다.

    [사족 : 송자문의 누이가 유명한 송씨 3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이다. 당시 중국에는 4개의 명문가문이 있었다.(송, 장, 공, 천씨로 기억한다.) 송자문은 당시 공상희와 더불어 중국, 아니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송애령은 공상희에게, 송경령은 손문에게, 송미령은 장개석에게 시집갔다. 각각 "돈과 조국과 권력과 결혼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손문에게 감동받은 송경령은 손문이 죽은 후, 모택동 밑에서 항일운동도 하고, 중국공산당 부주석을 2차례나 역임하여 명예 부주석으로 추대되었을 정도로 여성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반면 송미령은 “나에게서 동양적인 것은 오직 얼굴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구를 좋아했다. 그녀의 사치품을 운반하던 미 군용기의 병사들이 분노를 못 이겨 상자를 부숴버릴 정도로 사치를 즐겼다.
    공상희와 송자문은 장개석 밑에서 서로 재무부장, 외교부장, 중앙은행 총재 등의 요직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국민당을 망친 장본인들이다. 나중에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보낸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그 가운데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과 공상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그 돈을 뉴욕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7. 제7편 - 미·소의 방해를 격파하고 대한민국을 만들다

    내용
    제7편 - 미·소의 방해를 격파하고 대한민국을 만들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했을 때, 이승만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빨리 귀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앨저 히스같은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해 있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쉽지가 않았다. 고집불통의 반미인사로 낙인 찍힌데다가 반공·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귀국시키면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여권을 신청했지만, 한반도는 군사작전지역이라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여행허가증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행허가증을 신청하자 미 국방부는 맥아더 사령부에 전보로 요청했지만, 여권에 쓰인 “주미한국고등판무관”이란 직위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미 국무장관실이 국무부 여권과에 여권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은 여권을 반납하고 그 직위를 삭제한 새 여권을 받아야 했다.

    그러자 국무부는 다시 이승만을 위한 수송편 제공은 맥아더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국방부에 가서 맥아더의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했다. 그러자 국방부는 다시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국무부 여권과에 특별허가를 신청했지만, 이번에는 여권과에서 더 이상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분명한 귀국방해 공작이었다.
    안타깝게 생각한 올리버 박사는 그에게 “미국정부의 좌우합작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정부수립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할 것이므로 협조하라”고 설득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이승만의 정치외교고문이었다. 나중에 이승만 전기를 썼다. CIA의 스파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좌우합작은 공산화를 의미했기에 이승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조직이 없는 우파가 조직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패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오와의 시골에서 닭을 키우며 살게 되더라라도 좌우합작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은 일제가 항복한지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에야 하와이와 괌을 거쳐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것도 개인자격의 귀국이라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었고, 미군 군용기에서는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군복차림이었으며, 게다가 비밀리에 귀국해야만 했기에 김포 비행장에는 한 명의 환영객도 없이 몇 명의 미군들만 나왔다.

    한편 11월 23일에는 중경 임시정부의 김구 일행도 귀국했다. 미군이 김구의 귀국을 추진한 것은 군정의 협력자로서 공산주의자들을 견제시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중국을 떠나기 전, 장개석은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면서 30만 달러의 전별금을 주고, 2대의 비행기로 상해까지 태워 주면서, 귀국 후 중국정부와의 신속한 연락을 위해 무전사 3명을 딸려 보냈다. 이런 환대의 배경에는 임정이 한국에서 집권하기를 바라는 중국정부의 속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여담이지만 이승만이 이렇게 귀국에 곤란을 겪은 것에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다. 일제시대에 해외에 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국적이나 미국국적을 가졌다. 김구나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미국국적을 갖지 않고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그 때문에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미 국무부에서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 때마다 미국국적 취득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미국은 존 하지 중장을 미 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남한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는(미국은) 소련의 협조를 얻어 남북통일 정부를 세워주고 빨리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우파들과 똑같이 대우했고, 공산당 행사에 미 군정청 간부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공산당 본부 지하실에서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낸 어마어마한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졌는데도 공산당 사무실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미 군정청은 공정하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우익들을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1945년 귀국 후, 이승만은 이미 자신을 주석으로 앉혔던 “조선인민공화국”의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들과 접촉했다. 좌익들이 협조의 조건으로 친일파 숙청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대답하며 주석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 함께 갈 수 없다, 인간은 콜레라와 동거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독립운동 할 때부터 느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본능적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설 것이 확실해졌다. 아울러 신탁통치를 통해 한반도는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화될 것도 확실해졌다. 이승만은 이런 정세를 정확하게 예측했고 전력을 기울여 저항했다.

    1946년 2월에 이미 미 국무부는 좌우합작 지원지침을 하지 중장에게 내렸다. 그것은,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틀 내에서 미·소의 합의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시키라, 그리고 그 대신 토지개혁 등 진보적인 강령을 추진할 중도파 지도자들을 찾아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소련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소련이 이미 1946년 2월,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위원회”를 만들고 3월에는 토지개혁까지 했던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부가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 아닌가? 다시 말해 소련은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령지에서만이라도 확실하게 공산체제를 굳혀, 향후 남한까지 공산화할 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미군은 “미소공동위원회의의 틀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고 소련과의 협상에만 매달렸고 이승만과 김구가 협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청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전국을 돌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다. 소련군이 남한에 들어오면 동유럽처럼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련이 남한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과 유산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있었는데도 감히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지도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좌빨들이 잡고 있는 언론계와 지식인 사회로부터 분단 책동자로 공격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에서 화폐개혁으로 못쓰게 된 구화폐를 남한으로 가지고 들어와 자금도 풍부했기에, 신문사와 영화관을 사들여 대중선동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금기를 이승만이 과감하게 깨뜨렸는데 그것이 1946년 6월 3일의 ‘정읍 발언’이다.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선데다가 ‘미소공동위원회’도 더 이상 진전이 없으니, 남한 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소련군이 북한에서 이룩한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에게는 나라 없이 혼란 속에서 표류하기 보다는 우선 나라를 살려놓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정부가 미수립된 상태로 있다보면, 미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흥정에서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 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과 같은 좌우합작의 강요가 될 위험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 경우에 남한에 찾아 올 것은 공산화 뿐이었다. 11월에 이승만은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보도를 언급하면서 하루 바삐 정부를 세우고 국방군을 조직해야 남한의 공산화를 막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12월 12일, 미군정의 의회 역할을 하게 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문을 열면서 하지 중장이 과도입법의원에 좌파 인물을 많이 기용하자, 그렇지 않아도 사사건건 부딪히던 이승만은 하지를 더욱 비판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면전에서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이승만은 “앞으로는 하지에 공개적으로 맞서겠다”고 응수했을 정도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속한 정부수립을 위해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한 적이 있었다. 이 때도 미 국무부의 반대로 맥아더의 군용비행기 이용이 거부당해 민간항공을 이용했다. 그런데도 미국정부 관계자들은 아무도 이승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반공·반소주의가 미 국무부의 좌우합작노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언론기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홍보했다. “남한에 일단 과도정부를 세웠다가 때가 되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식 통일정부를 세우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미군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미 국무부 안에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있다”, “하지 중장이 좌익들에게 유리하게 행동하고 있다”, “소련군이 북한에서 50만 공산군을 양성하고 있는데도 미군은 남한에서 전혀 그러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고 있어, 남한은 북한에 의해 끌려다닐 위험에 놓였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이승만의 주장에 대해 미국의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쯤에 미국인들은 유럽, 발칸반도, 중동에서의 소련의 팽창야욕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승만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하지 중장도 1947년 2월 미국으로 갔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정부수립만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방법이라는 기존의 정책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지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고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이승만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승만의 귀국 역시 출발 전날 군용기 탑승허가가 취소되는 등 미 국무부의 방해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이승만은 하지 장군이 발행하는 한국 입국허가서도 얻지 못한 불안한 상태에서 민간항공을 이용하여 미국을 떠나야 했다. 동경에 도착한 이승만은 맥아더를 만나고 다시 장개석을 만나기 위해 상해를 거처 남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원래 김구 지지자였지만, 2차 국공합작이 끝나고 다시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을 하게 되면서 뒤늦게 공산주의의 전략을 깨달아,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대표인 유어만 공사를 통해 김구에게 이승만과 협력하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2일, 마침내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유화정책에서 강경정책, 포위정책으로 바뀌게 되는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를 경제적, 군사적으로 도우려는 의도에서 발표된 선언이었다. 선언이 발표된 다음 날, 감격한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그렇게도 완강하던 미국이 이승만의 주장과 통찰력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11월 14일, UN총회는 UN감시 하의 남북한총선거를 결의했다. 이승만의 예측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공하지 못했고, 소련과 합의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국 좌우합작론자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사태는 이승만이 예견한 대로 진전되었고 그 때문에 국민들에게, 그 동안 미국 정부는 어리석었고 이승만은 선지자 같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은 생략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김구는 끝까지 좌우합작을 주장했고 국민들을 속였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투표(5·10선거)  전, 김일성이 꾸민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김구는, 김일성에게 아니 스탈린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
    참가한 수 십개의 정당사회단체가 모두 김일성이 급조한 관변단체였고, 그나마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개회 3일 째에야 축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김구는 김일성이 마련한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기분이 상한 김규식은 불참했다).
    김구는 김일성과 공동으로 “5·10선거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해도 내전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면서, 미군철수를 주장한 성명서도 발표했다. 노동절인 5월 1일에는 중국 팔로군까지 참가한 군사퍼레이드를 참관하기도 했다.(그러고보니 오늘이 노동절이다.) 북한의 전쟁준비에 압도되었는지 김일성에게는 “통일되면 정치를 안할테니 과수원이나 하나 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전술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 공사와 만나서는 “러시아는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그러면 단시간에 여기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북한의 막강한 군사력을 직접 목격했고, 김일성의 남침을 알았으며, 남한의 군사력은 협편 없고, 따라서 남한정부는 곧 소멸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국민들에게는 “북한은 남침하지 않는다. 김일성이 전기를 보내 줄 것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라며 거짓말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김구는 “공산주의 통일이라도 통일은 무조건 선(善)”이라고 믿었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국제질서와 공산주의에 무지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김구를 해방 전까지만 인정한다.

    “여보게 백범. 김일성은 왜 만나러 가나? 갈 테면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담판해야지.”
    이게 평양으로 떠나는 김구에게 했다는 이승만의 말이다.

    이 문장은 국제질서에 대한 두 사람의 지식의 차이, 통찰력의 차이와 함께, 문제의 핵심에 직접 부딪히는 이승만의 기질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다. 꼭두각시 말고 조종자를 직접 만나라는 말이다. 국제질서의 핵심을 이해하고, 2명의 루즈벨트, 윌슨, 트루먼, 아이젠아워 등과 단도직입적으로 맞서면서 협상했던 이승만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김구가 정권을 잡았다면, 대한민국은 없었고, 한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어쩌면 한반도판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중·소의 주변에서 독립했던 나라 중에 공산화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그 공산화 지도를 제1편에서 제시한 바 있다.

     
  8. 제8편 - 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다

    내용

    제8편 -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다


    소련과 중공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가 터졌다.
    이승만은 80세에 가까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주 전선과 훈련소를 찾아 군인들을 격려했다. 지프차로 위험한 산길을 달리기도 하고, 작은 정찰기를 타고 적의 포화를 피하기도 했다.
    1951년 9월, 이승만이 강원도 양구 북방의 전선을 시찰할 때는 쌍발기가 적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나무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고, 돌아올 때는 폭우로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이 아닌, 대구 동천비행장에 내린 적도 있었다. 예고 없는 도착이라 30분이나 지나서 지프차가 마중 나왔고, 병사들과 야전식으로 끼니를 때운 후 폭우를 뚫고 지프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미국과 대립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했는데 장면이 뽑힐 가능성이 높았고 내각제로 개헌하자는 움직임도 거셌다. 농지개혁에 반대해 온 지주정당 한민당 계열이 반이승만 중심세력이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펴서 국회의원을 잡아넣고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다. 소위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진통일 주장만 하는 이승만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검토했다. 하지만 이승만을 대체할 리더십이 없고 후방에서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쿠데타 계획은 철회되었다.

    휴전협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은 협상의 백미다.
    주지하다시피 미군은 빨리 휴전협정을 맺어 한반도에서 철수하려고 했고, 이승만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정식 항의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그 경우에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도 좋지만, 공중 폭격, 야포 사격, 함포 사격의 지원만은 계속해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에 이승만은 다시 양유찬 주미 대사를 통해, “만일 한국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으로부터 빼내겠다”고 또 다시 미국을 협박했다.

    그러나 휴전 방침을 굳힌 미국과 유엔은 휴전협상을 강행했고,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정부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휴전을 하려는 데 대해 분개했다. 특히 유엔 측이 북한이나 중공에 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자는 공산측의 요구에 양보했던 것에 대해 수용할 수 없었다.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그럴 수 없었다. 북한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이, 친공적인 중립국 대표들의 압력과 설득에 의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게 할 수는 없었다.
    중립국 가운데서도 특히 친공적이고 친소적인 인도의 군대가 모든 경비를 맡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인천항에 도착한 인도군의 상륙을 거부했고 인도군은 할 수 없이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마침내 이승만은 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에게 비밀리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던 것이다.

    1953년 6월 18일 새벽2시였다.
    거제도 등 전국의 수용소에 나뉘어 있던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들은, 한국군이 유엔군 초병들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쏜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60여 명의 반공포로가 미군 경비병들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무사히 탈출하여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가장 큰 쟁점은 반공포로 처리 문제였는데, 미국 측은 자유의사 송환, 공산 측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면서 2년간 휴전협상을 끌어왔던 때였다. 그 사이 전선에선 치열한 고지전으로 엄청난 희생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이승만의 이 돌출행동은 “미국이 포로 문제를 양보하고 적당히 공산군측과 합의를 보고나서 서둘러 한국을 떠난다면, 한국군이라도 단독으로 북진하여 휴전협상을 깨겠다”는 각오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세계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산군 측을 분노케 하여 휴전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강력한 어조로 항의했다. 유엔 참전국들도 격렬히 항의했다.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알려진 영국 수상 처칠은 극단적인 용어로 이승만을 비난했다.

    미국은 또 다시 ‘에버 레디 작전(Ever Ready Operation)’이란 이름으로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지만, 부산정치파동 때와 같은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고 결국 이승만을 달래지 않고서는 휴전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여 3주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물게 하면서 이승만과 힘겨운 협상을 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 주는 조건으로 ‘한미동맹 체결’, ‘경제원조’, ‘무기지원’을 요구했다. 휴전으로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북한의 재남침 위험이 너무 커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이 약소국 한국과 상호방위동맹을 맺는 데 찬성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이 상호방위이지, 누가 미국을 침공하며 한국이 어떻게 미국방위를 한단 말인가?) 그 때문에 회담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에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극적인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지금 한국인들의 반공투쟁이 18세기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립투쟁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는 내용의 방송연설을 했다. 그 방송을 듣고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이승만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왔다. “한미동맹의 결성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주 의회들도 있었다. 허스트 계통의 신문들을 비롯한 우파 성향의 신문들은 지지 논설을 실었다.

    휴전협정 체결 직전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승만의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를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측근에게도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 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8월 3일, 한미방위조약 체결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을 서울로 보냈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해방 전부터 알던 사이였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두 사람은 입장은 크게 달랐다. 덜레스는 대한민국이 다시 북한의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은 군사원조의 의무만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공산세계에 대한 자유세계의 싸움에서 대등한 동반자로 보고 미국은 아낌없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했고 10월 1일 정식으로 조인했다. 그 조약으로 이승만은 적어도 미군 2개 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에 필요한 군사원조와 경제부흥에 필요한 장기적인 원조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미국과 세계를 향한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이 한미동맹이란 한국의 생명줄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한미동맹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이승만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수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9. 제9편 - 협상의 귀재

    내용
    제9편 - 협상의 귀재

    이 시리즈 서문에서 나는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꿰어 한반도 현대사에 집어넣었다”고 표현했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이미 그 예를 많이 들었기에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음을 느끼셨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로 미국을 상대로 한 그의 협상방법, 진정한 속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자.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탁월한 협상전략과 돌파력 역시 당시 국제질서와 그 미래에 대한 이해와 예지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결국 소련은 실패했고 미국은 그에게 질질 끌려 다녔던 것이다.

    1949년부터 6·25가 한창이던 1952년까지 주한미국대사로 일했던 존 무초의 이승만 평이다.
    “그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온 의지의 인간이었다. 그는 아주 고차원적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고,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꿔준 돈 받는 것처럼 당당했다. 6․25를 거치면서 1954년에는 65만 명의 병력이 정부예산의 40%를 사용할 정도로 군이 급성장했다. 이승만은 이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냈는데, 소련과의 냉전에서 한국이 최전선을 맡고 있었기에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떳떳하게 요구했다.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요구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부흥부장관을 했던 송인상의 회고록에 있다. 1958년 9월, 송인상이 원조협상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경무대로 이승만을 예방했을 때 이승만은 이런 말을 했다.
    “원래 우리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의 조야에 널리 알리게. 38선 얘기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 더 많이 달라고 해 봐. 그리고 ‘조그만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 봐.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네.”

    미국에서 치룰 전쟁을 한국이 대신 해줬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미·소냉전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전쟁을 우리가 맡았다는 뜻이 아닐까), 저 일화는 이승만이 미국의 원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6·25가 끝나면서 한국은 문명의 대전환에 직면했다.
    수 천년 동안 대륙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었던 왕래가 단절되면서 한국은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소속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양문명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이 해양문명권의 일부인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중·소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한국·대만을 하나의 지역공동방위체로 묶으려고 했고, 그래서 한국에게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하게 권했다. 유난히 일본을 싫어하는 이승만으로서는 미국의 이런 요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렇게 미국이 이승만에게 한·일수교를 압박하던 때인 1954년 7월 말, 즉 6·25가 끝난지 1년이 지났을 때, 제1차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이승만은 미국에 갔다. 그렇지 않아도 이승만은 6·25 때 미국이 북진을 주저하고 휴전을 서두른 것에 대해 불만이 많던 때였다.
    미 공군기를 타고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한 이승만은, 닉슨 부통령 부부가 참석한 공항 환영식에서의 즉석연설에서 마이크를 잡자마자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15분 내내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고는 “우리는 기어이 우리들의 계획을 달성하고야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설 내용은, 이승만이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이며 단순한 떠벌이였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분석이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올리버는, 이승만은 싸우려는 의도를 갖고 미국에 갔다고 해석했다. 즉 한·일수교를 압박하는 미 국무장관이나 미 대통령을 우회하고 직접 미국민들을 상대함으로써,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적인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공항 연설이 아이젠하워에게 전달될 것을 예상하고, 정상회담에서 기선과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강경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발언이 이승만의 협상전략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민이 대단히 존경해마지 않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라는 하원의장의 소개를 받으며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단에 섰다. “미국인들이 한국을 위해 베풀어준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인사말로 시작한 이날 연설은 33회의 박수를 받았다.
    이튿날 아이젠하워와의 회담 전, 이승만은 숙소인 호텔에서 미국이 만든 공동성명서 초안을 보았다. 초안에는 “한국은 일본과 우호적으로…” 어쩌구 하는 글이 있었다. 이승만은 읽고 나자마자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호텔방에 앉은 채 회담장에 가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독촉전화가 걸려오고,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이승만은 10분 늦게 백악관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덜레스 국무장관, 윌슨 국방장관,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한국에서는 손원일 국방장관, 백두진 경제조정관, 정일권 육참총장, 양유찬 주미대사 등이 배석했다.

    회담 첫 의제부터 아이젠하워가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측 대표를 내쫒았던 일을 따지고, 이승만은 그들이 간첩질을 했기에 당연했다고 대답하는 등 날카로운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아이젠하워가 한·일 국교수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은 “내가 살아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그의 등 뒤에 대고 “저런 고얀 놈이 있나” 하고 소리쳤다. 잠시 후 아이젠하워가 화를 식히고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이승만이 “외신기자 클럽에서의 연설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간다.” 하고는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양유찬 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 4억 2000만 불, 경제원조 2억 8000만 불, 도합 7억 불의 원조를 받아냈다.

    이승만은 귀국 전,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8월 2일 뉴욕 시에서 ‘영웅 행진’이란 카퍼레이드를 받을 때, 숙소인 호텔에서 브로드웨이를 거쳐 뉴욕시청에 이르는 길에 100만 명의 시민이 나와 환영했고, 고층빌딩에서는 색종이가 뿌려지고, 선두에는 3군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했고, 뉴욕시청에 도착해서는 6·25 영웅 밴 플리트 장군이 환영사를 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대환영이었는데, 이런 성대한 환영식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용감하게 맞선 한국의 노영웅에 대한 미국민의 감사 표시였을 것이다.

    이상의 일화는, 비록 작고 힘 없는 나라에서 온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에게조차 당당하면서도 협상에서도 성과를 거둘 줄 아는 협상의 고수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은 중국과 수교하여 소련을 고립시켰던 위대한 전략가이다. 1953년 6·25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닉슨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궁전에 갔었다. 닉슨은 수도 자카르타가 엉망으로 더렵혀진 모습을 보고는 “수카르노는 독립전쟁 때는 영웅이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일기에 썼다. 캄보디아의 국왕 시아누크를 만나고는 “정치엔 무관심하고 음악 얘기만 한다, 희망이 없다”고 썼고, 고원 별장을 천국처럼 꾸며놓은 베트남 국왕 바오다이를 만나고는 “국사에는 무관심하고 개인이익만 챙긴다”고 썼다.
    닉슨은 이어 한국에 들렀다.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과 합의 없이 북진해선 안된다는 보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친서에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휴전하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면서 북진통일을 외치고 휴전을 반대했던 이승만이 정말로 단독으로 북진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북진에 대한 닉슨의 거듭된 우려와 반대에 이승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지도자가 미국의 명령에 복종만 한다는 사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미국은 공산주의와 대항하는 가장 큰 수단을 잃을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이 어느 쪽으로 튈지 알 수 없고, ‘이승만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란 것을 보여줘야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진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미국을 도와주는 일이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승만이 비록 북진통일과 휴전반대를 그렇게도 외쳤지만 모두가 협상전략이었을 뿐, 내심은 단독북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닉슨은 이승만의 용기와 지적능력에 감동을 받았다고 일기에 썼다. 닉슨은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면서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그 노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사후에 알게 됐다”고 썼다. 공산주의자와 싸울 때는 “카드를 먼저 보여줘선 안 되며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함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닉슨은 회고록에서도,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주지하시다시피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대단했다.
    일본 얘기만 나오면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6·25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에 처했던 1951년 초, 미국은 일본군을 유엔군에 편입시켜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검토했었다. 이승만은 노발대발하면서 “만약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진면목은 그가 맹목적인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 총독부 관료 출신으로 친일파로 몰렸던 임문환의 회고다.
    1951년 초, 이승만은 임문환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했고, 임문환은 역시 친일파였던 일본 고등문관 시험 동기 이태용을 차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친일파라며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문환을 불러 이런 대화를 했다.
    “군(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했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이태용(李泰鎔)은 성명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 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이승만이 이어 말했다.
    “일제가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 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일본은)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친일파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자중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군(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놀라운 일화다.
    일본과는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던 이승만이었다. 6·25 때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일본군이 참전하면 먼저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리겠다고 말했던 이승만이었다. 나중의 일이었지만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권고하던 아이젠아워에게 “고얀 놈”이라고 호통치던 이승만이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면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던 이승만이었다. 일본 얘기만 나오면 얼굴 근육이 실룩이던 이승만이었다.
    그런 이승만이 “개인적인 대일 적개심은 이미 잊었다는 것, 일본은 미국에 붙어 번영하고 다시 한국에 온다는 것, 그 때 친일파들이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련은 붕괴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승만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긍정적인 면에서) 협상의 귀재였던 것이다. 물론 일본의 부흥과 소련의 붕괴를 예언한 것도 모두 맞았음을 우리는 안다.

    일본의 6·25참전 얘기가 나온 김에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바로 장개석 자유중국(대만)군의 6·25참전도 이승만이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1953년 초, 대만군의 참전 가능성이 논의되자, 이승만은 또 다시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이승만에게 있어, 중국은 한국을 오랫동안 지배함으로써 한국의 발전을 가로 막고,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10여 년 동안 원세개의 지배 때문에 한국이 개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해방 직후 정부가 없는 혼란기에 화교들이 암거래, 밀수, 불법통화 거래 같은 비리를 저지른 데 대해 이승만은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공산주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데 대해서는 협조했다. 그래서 1949년 8월에는 장개석을 초청하고 1953년 11월에는 그 자신이 대만을 방문했다. 이 일화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철저하게 현실적인 이승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방 전후에 걸친 이승만의 수많은 선택, 반공포로 석방, 위에 언급한 협상사례와 그의 진정한 속셈 등을 유추해보면, 이승만은 미국 등을 상대로 말 그대로 벼랑끝 전술을 펼쳤고, 그 때마다 승리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의 벼랑끝 전술은 이승만에게 배운 듯 하다.) 더구나 이승만은 결국 협상 상대방까지도 자신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10. 제10편 - 농지개혁

    내용
    제10편 - 농지개혁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위대한 업적 중 절대 뺄 수 없는 업적이다.

    토지개혁은 원래가 어렵다.
    필리핀이나 중남미 여러 국가에서 소수의 대지주 가문은 방대한 토지를 대물림하며 초호화 생활을 하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소작농으로 살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멕시코는 1821년 독립 후 지금까지 3차례나 큰 토지개혁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가난을 못 이겨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백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니 대한민국은 단칼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우리 농촌사회는 지주제의 지배 하에 있었다.
    대지주가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 주고 수확의 절반을 지대로 수취했고, 전체 농가의 75%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수확의 절반을 바치면서도 소작지를 떼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사실상의 농노였다. 이런 약탈적 토지 이용관계를 그냥 두면, 지주와 소작농은 숙명처럼 대물림하여,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적인 국민의 성립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제도를 실질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만 했다. 농지를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은 시대적 당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았지만 국회는 야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민당을 비롯한 국회의원의 대다수가 지주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 때문에 농지개혁 법안은 수정을 거듭하다가 6·25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가서야 겨우 확정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는 용인술을 펼쳐 농지개혁법을 밀어부쳤다.

    좌익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대지주의 농지를 몰수하여 농부에게 대가없이 나누어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주장하고 있었다. 김구의 한독당도 찬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한식 농지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의 노예에서 정부의 노예로 바뀔 뿐”이라며 반대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농지를 잃은 지주에게도 적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유상수용 유상분배의 원칙을 주장했다.
    유상수용 유상분배는 자유민주자본주의의 핵심 원리인 사유재산 존중의 정신이다. 이는 북한의 무상수용 무상분배와 대비되는데, 그 효과의 차이는 이후 남북의 발전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사실 “북한은 토지를 무상수용했다”라는 말조차 관대한 표현이다. 지주들을 내쫒고 처형했기에 무상몰수 그 이상이었다. “무상분배”라는 표현도 옳지 않다. 무상분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뺏은 농지와 토지가 모두 집단농장화 되어, 개인은 매매, 대여, 저당 등의 재산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의 토지개혁(농지 포함)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오직 무상몰수만 있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당초 1949년 3월 국회에 상정된 개혁법에서는, 농지소유 상한을 3 ha로 정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되, 농민이 부담할 지가의 상환액은 평년 수확가의 300% 로 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압력을 가하여 농민 부담 상환액을 150%로 낮춰 국회를 통과시켰다.
    (아마 이승만이 국회에서 소수파임에도 불구하고 집권기간 동안 내내 국민들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농지개혁일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이 나중에 부산정치파동으로 나타나 이승만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선제를 밀어부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매년 생산량의 일정률을 지가상환액으로 정부에 납부하면, 정부는 그 액수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종전 지주에게 지급하여, 정부가 접수한 일본인 공장들을 지가증권으로 불하받을 수 있도록 했다. 국유화했던 일본인 재산을 민영화하는 데에 지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에 발발한 6.25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지가증권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보다 훨씬 할인해서 팔아 생활해야 했다. 토지자본이 부스러기처럼 흩어져서 정부가 의도한 산업자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만은 산업자본화에 성공하여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화로 가게 되었다.) 
    더 이상의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지주가 아닌 제3자도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구입하여 기업체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자, 신흥 기업가들이 새로이 등장하기도 했다. 삼양사 김연수, 두산 박두병, 선경 최종건, 한국화약 김종희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비율은 토지자본의 일부에 불과했다. 

    농지개혁을 시행하니 1950년대의 한국사회 구조가 혁명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주제가 소멸되고 전 경지의 92.4%가 자작지로 바뀌었다.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농지를 팔고 자기의 원래 신분을 모르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서 새로 농지를 구입함으로써, 꿈에 그리던 일가를 창립하고 독립자영농으로 새출발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져 농업생산력도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
    양반과 상민, 지주와 소작인으로 구별하는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역사상 최초로 사민평등의 시대가 찾아왔다.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우리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이 없는 균질사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시장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으며,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은 효과도 있었다.
    농지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되기도 전에 이승만은 행정명령으로 농지분배에 박차를 가했는데, 그 바람에 법안 통과 전에도 실질적으로는 농지개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법안 통과 당시에는 대상 농지의 7~8할이 이미 분배된 상태였다. 법안 통과 후 3개월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지만, 이미 그 전인 3월부터 ‘분배농지예정통지서’를 농민들에게 발급해줬기 때문에, 농민들은 농지 소유주가 된다는 기쁨과 함께 “저 농지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인데도, 농민들은 소유권 없이 경작권만 주는 북한식의 토지개혁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농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았고 대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6·25 중에 북한군에 동조하는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하면 남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북한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는데,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이를 막았던 것이다.

     


  11. 제11편 - 평화선 선언과 독도 영유권 쟁취

    내용
    제11편 -  평화선 선언과 독도 영유권 쟁취

    6·25 전쟁으로 한국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 어부들은 한국의 해안과 독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샌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것이므로, 그나마 있던 맥아더 라인도 없어질 형편이었다. (일본 어부들은 맥아더 라인을 넘어 외해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선의 숫자나 성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게 우수한 일본 어부들의 침범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수자원과 독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해안에 평화선, 일명 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책(海柵, 해양경계선)의 상하에, 이미 알려져 있고 또는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深度)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 해책에 대한 국가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이 ‘평화선 선언’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기습이었다.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니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위기 상황이었다. 한일 간의 예비회담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을 때였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한일회담에서만큼은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고, 반면 한국은 일제 통치에 대한 보상심리와 경계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첨예하게 이해가 맞서고 있었던 셈이었다.

    일본의 반발은 엄청났다.
    일본정부의 공식 항의성명 뿐 아니라 일본 언론에서도 ‘공해자유를 완전 무시’, ‘한국, 어업교섭에 선수치다’, ‘오만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주권 선언은 영토침략’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 각지에서는 연일 평화선 선포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평화선 선포 후로는, 한일회담에 나온 일본대표들은 본건은 제쳐놓고 “한국측이 과연 한일회담을 계속하려는 성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는 등의 언사를 퍼부었다. 또 미국, 영국,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도 평화선 선포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내면서 일본 편을 들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단호했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선박을 나포하고 체포한 어부들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1952년 2월에는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할 때는 한국 경찰이 일본 선장을 사살하기도 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했다.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기도 했다.

    1955년 12월에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 경찰관 4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60년 1월에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하던 중 총격을 받고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도는 피로써 지켜졌고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승만의 이승만다운 결단 덕분인 것이다


     
  12. 제12편 - 교육개혁과 인재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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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편 - 교육개혁과 인재양성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남다른 교육열로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다. 이승만은 1949년에 무상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정부와 민간단체들에 의해 성인을 상대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문맹자 비율이 1948년 80%에서 1959년에는 22.1%로 낮아졌다.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1배, 대학생은 12배가 증가했다. 그들은 1960~197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훌륭한 숙련공이 되었다. 교육에서 비롯된 남녀평등 사상도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해외로 진출할 국제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한국외국어대학을 세웠고, 전술했듯이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에서 인하공대를 설립했다. 해방 직후 19개에 불과했던 대학이 1960년에는 63개로 늘어났다.
    해외 유학 붐도 일어났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매년 평균 600 명 이상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유학의 기회를 주었다. 이러한 변화로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들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엘리트 중, 특히 군(軍) 엘리트의 급성장이 단연 돋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군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양과 질에서 모두 급성장한 상태였다. 그 때는 기업이라고 해봐야 몇 명 ~ 몇 십 명의 종업원을 둔 가내 수공업 수준이어서, 수 백 ~ 수 천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관리하고 기획해 봤던 유일한 경험집단이 군 장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원조 계획에 따라 매년 1,000 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미군의 선진 군사기술과 조직관리 기법을 배우게 되자, 유능한 장교집단이 형성되었다. 당시 군 장교들의 미국 유학 비율은 어떤 집단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군이야말로 가장 선진적이고 고급의 집단이었다. 이렇게 힘과 실력을 갖춘 장교들 중 최상위 엘리트들은 나중에 넘치는 파워와 경험과 역사관으로 5·16혁명을 일으켜, 수 천년을 숙명처럼 이어왔던 가난을 몰아내고 공업화와 근대화를 선도하게 된다.

    정부 안에서도 새로운 테크노크랏들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관청이나 은행에서 말단 직원으로 경험을 쌓다가 해방으로 일본인들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다시 미국에 단기 연수나 유학을 가서, 미국식 기획․ 관리 제도를 배워온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1950년대에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지주적·유교적 기반을 가졌거나 일본식 교육과 경험을 쌓은 구식 엘리트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통치하는 기간에 구시대의 엘리트를 대체할 새로운 엘리트가 사회 전 분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6·25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인명 피해만 해도 죽거나 행방불명 되거나 다친 한국인은 남북한을 합쳐 400만 명에 이르렀다. 재산 피해액만도 2년간의 국민총생산액을 넘을 정도였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회복시킬 수 없는 규모였다.
    그 때문에 미국의 원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미국원조는 대한민국의 생존에 절대적이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50년대에 정부 예산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86%에 달했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57년도에도 53%나 되었다.

    여담이지만 6·25가 불행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이 방에서 발제한 적이 있지만, 한국사회에 끼친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를 하향 평등화하여 모두를 밑바닥부터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것, 우수한 북한출신 두뇌들이 남한으로 대거 합류하면서 정체되었던 남한 주민들과 자유경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반대로 북한은 대규모 두뇌유출이 되었다), 군인이라는 엘리트 집단을 만들고 그들을 국가발전의 전면에 나서게 만들었다는 것” 등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자력 기술의 도입이다.
    1956년 7월, 미국인 전기 기술자 W.L 시슬러를 만나면서, 이승만은 장래의 에너지는 원자력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1956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 농축 우라늄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곧 문교부 내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고, 몇 년에 걸쳐 100명에 가까운 연구생을 미국에 파견했으며,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원자력연구소도 설립하고 서울대학교에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했다. 

    특히 미국 원조금 35만 달러에 정부 자금을 보탠 73만 달러로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마크2를 구입하여 설치했고 운영했다. 그들의 기술은 당장 원자력의 에너지화나 무기생산에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해 의학, 농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했다


     
  13. 제13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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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1)

    이쯤 해서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알려진 문제들도 살펴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놀고 먹다가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았고, 그 과정에서 좌우합작을 거부하여 조국을 분단시켰다”는 비난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그것은 악의적 모함이며, 오히려 집권과정에서 이승만은 사사건건 미국의 방해를 받았고, 사실상 단 한 번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일견 미국이 그를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은 미국이 결국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임도 밝혔다. 그가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미국의 코를 꿰어 한반도 현대사에 집어넣었다는 것도 밝혔다.

    또 무엇이 있을까?
    “친일파 청산 거부로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다, 6·25 발발 직후 거짓방송을 하고 먼저 도망갔다, 한강 다리를 조기에 폭파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집단살인을 했다,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했다, 3·15부정선거를 했다”는 정도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이론이 많고 사정이 복잡한데다가 나 자신의 지식과 지면의 한계 등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간단히 평가해보겠다.

    먼저 친일파 청산 거부.

    해방 후 미군정이 3년간 있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친일파 문제는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시 불안했던 치안의 유지가 우선이었던 미군은 일제 하의 경찰들을 그대로 썼다. 그래서 당시 경찰의 절반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재적 141, 찬성103, 반대 6인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고, 이승만에 의해 법률로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어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 8월까지 특검에 송치된 자가 599명, 기소된 자가 221명, 재판이 종결된 자가 38명이었다. 재판에서 체형 12명,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내지 형면제가 8명이 있었는데, 체형은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기타 징역 1년 ~ 2년 6개월, 집행유예 등이었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2 명도 곧이어 6·25가 발생하여 석방되었다. 즉 반민특위가 제대로 처벌한 친일파는 1 명도 없었다.

    당시 좌익세력은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고 이게 먹히고 있었다.(요즘도 그런데 당시에야 말 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경찰들은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민특위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세력은, 정도의 차가 있을망정 친일 경력자가 다수 포진해 있던 경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동료가 체포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고, 심지어 반민특위의 사람들이나 재판관들조차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너나 나나 똑같은데, 누가 누구를 재판하느냐” 란 말이 수사 과정이나 재판정에서도 나왔다.

    여러 명의 경찰들이 체포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를 체포하고 고문한 노덕술을 들 수 있다. 군대보다 막강했다는 당시 경찰집단이 똘똥 뭉쳐 반격에 나섰다. 서울시경 국장 지휘 하에 경찰부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요원들을 폭행하고 연행하는, 공권력에 의한 백주의 테러(6·6반민특위 습격사건)가 발생했다.

    그러다가 5월 국회프락치 사건, 6월 김구암살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반민특위 활동이 위축되더니, “1949.8.31까지만 반민특위가 활동한다”는 곽상훈의 특별법개정안이 통과되어, 결국 8월 31일 반민특위는 해산되었다. (강제로 해산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경찰의 불법행위를 묵인했다.
    이승만은 “좌익분자들이 살인방화 등 지하공작을 하고 있어 경험있는 경관의 기술이 필요한데, 마구 잡아들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담화문도 발표했고, 이에 맞서 국회는 성명서를 내면서 반발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왜 실패했을까?
    먼저 친일파 청산세력의 힘이 그 반대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임시정부를 따라 온 광복군의 수는 300 명도 안 되었고, 그나마 흩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해방 자체도 미·일 간 전쟁의 결과로 일본 제국주의가 해체됨으로써 이뤄진 것이었고, 대한민국의 성립도 크게 보면 미국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적 제약 속에서 친일파를 엄단할 권위와 물리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수 십 명 뿐인 반민특위의 인원으로는 수만 명의 경찰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의지가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경찰 편을 들어줬다. 이승만으로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친일청산을 추진하는 것이 더 없이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경찰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권력욕 때문이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자.
    엉성하게 나라를 세운지 1년도 되지 않아 행정력, 군사력, 경제력은 걸음마 단계였고, 전국 곳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골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며, 무식하고 감정적인 국민들은 이리 저리 휩쓸리며 몰려다닐 때였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정부의 실무관료(테크노크랏)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보기에 민족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이승만은 자칫하면 경찰력과 행정력과 군사력까지 와해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에 의한 공산당의 폭동이, 여수·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군대 반란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휴전선에서는 끊임 없이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남침준비가 한창이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경제적 상황도 악화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도 베이징과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함락되었고, 소련 점령 하의 동구에서는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지만 많은 나라가 사회주의 정부로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을 오직 이승만만이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보기에 잘못 하다가는 아기와 같이 연약한 나라가 자라기도 전에 살해될 판이었다.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종합적 판단의 결과로 그는 반민특위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가 구성한 초대 내각에 2~3 명의 친일파가 포함되었다는 여론이 일었을 때도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일제 때 드러내놓고 친일했던 사람들, 즉 영혼까지 팔아 친일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참여하거나 주요 요직에 참여한 사례는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면 증거를 제시하시기 바란다.)

    이제, 7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봐도, 나는 당시 이승만의 관찰과 결단이 옳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민특위가 성공했다면, 친일파들을 일거에 처단하여 일시적으로 국민들 속은 시원해졌을지 몰라도, 그 후유증과 혼란을 감안할 때, 분명히 대한민국은 그 이듬해 발생한 6·25로 인해 살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시 시대상황은 가슴이 후련한 상태로 죽느냐, 아니면 가슴이 답답해도 살아남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였고, 이승만은 눈 딱 감고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명분이 아닌 실리를 택했던 것이다. (이런 프레임은 나머지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모든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나중에 해방 후의 혼란 상황을 연표 형태로 제시하겠다.) 거의 혼자 하다시피했던 이승만의 그 탁월한 선택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70년 후의 우리는, 이런 이승만의 고민과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

    솔직히 까놓고 물어보자.

    이승만이 그 반대를 선택했다면 그 이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는 지금보다 행복할까?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14. 제14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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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2)

    다음은 6·25 때 혼자 도망갔다는 비난과 서울사수 거짓 방송.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이승만은, 서울이 곧 함락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안심하라”고 방송하고 나서, 자신은 대구로 내뺐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미리 방송을 녹음해 놓고 도망갔다는 비난도 받는다. 이건 어디까지 사실일까? 당시 상황을 보자. (알아보니 참으로 많은 설들이 있어 어느게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정리해보겠다.)

    북한의 남침시각은 1950.6.25 새벽 5시였다. 국방부는 늘 있던 군사충돌이 조금 심각한 정도라고 판단하고 오랫동안 보고하지 않았다. “문제 없다”는 식의 보고만 올리고, 서울시민들에게도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까지 했다. 이런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판단과 보고는 이날 오전 11시 30분 국무회의 시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마도 대통령을 안심시키려는 마음이 앞섰거나 아니면 제대로 상황파악을 한 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만큼 당시 국방부는 엉망이었다.

    이승만에게는 경무대 김장흥 총경이 첫 보고를 했는데(신성모 국방장관이 첫 보고를 했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점은 8시 설, 10시 설, 10시 30분 설 등이 있다. 비서 황규면이 9시 30분에 급히 경무대에 불려갔을 때, 이승만은 화난 얼굴로 동경의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신성모가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고 한다.

    소련제 야크전투기가 서울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11시 30분에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승만은 두루뭉수리 보고하는 신성모에게 “정확한 것만 말하라. 정확한 것만”이라고 주문했지만, 신성모는 “각하. 조금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고만 되풀이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면남침이라기보다는 남파간첩 이주하, 김삼룡을 내놓으라는 움직임 같다”고 보고했다. 국군이 판판히 깨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누구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보고만 올라오니, 이승만도 흔히 있던 무력충돌이 다소 크게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대통령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당황해하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는 당시 경무대 비서 민복기(후에 대법원장)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이승만은 이날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웠다. 26일이 되자 전황은 더욱 불리해지고 있었지만, 신성모는 계속 “걱정하실 것 없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나 다른 기관들의 보고는 비관적이었다.

    이승만이 전면전임을 안 것은 26일 새벽 3시 경이었다. 이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증언을 위주로 쓴다.
    이승만은 동경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지만 부관 코트니 휘트니 준장이 전화를 받으며 맥아더가 깨면 전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프란체스카가 너무 놀라 수화기를 막을 정도였다. 휘트니 준장도 미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맥아더를 깨워 바꿔주었다.

    (또 다른 목격자 민복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빨리 도와주지 않으면 남한에 있는 2,500 명의 미국인을 우리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며, 놀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고 한다. 영어는 프란체스카가 더 잘했을 것이므로 일단 그녀의 증언을 싣는다. 다만 기억력과 상황판단은 민복기가 더 나을 것이라고 보이므로 어느게 사실인지는 미지수다.)  

    이승만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무스탕 10 대를 보내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에 국방부 관계자들은 또 무스탕기가 있으면 북괴를 막아낼 수 있다면서 대통령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맥아더와의 통화가 끝나자 이승만은 워싱턴의 장면 대사를 불러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국방부는 2~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상 프란체스카 증언) 이날 밤에는 소련제 야크기가 중앙청 근처에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다.

    27일 새벽 1시경 조병옥·이기붕이 경무대로 뛰어들어와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하며 피신을 권했다. 이승만은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거절했다. 결국 프란체스카 여사가 1시간 이상 설득한 끝에 이승만이 승용차에 오른 것은 의정부가 뚫린 새벽 3시 반 경이었다.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던 6월 25일의 방송을 피난방송으로 바꿀 경황도 행정적 여력도 없었다.

    열차는 행선지도 정하지 못한 채 새벽 4시에 서울역을 출발했다. 수원을 지날 때 잠깐 졸던 이승만이 황규면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 판단했어. 서울을 떠나선 안되는데, (차창에 비치는 시골 풍경을 보며) 저거 좀 보게. 얼마나 어질고 순박한 국민들이야? 내가 저들을 버리고 떠나다니” 하고 한탄했다. 대전을 지나 대구로 가고 있는 것을 안 이승만은 “차를 세워라. 기차를 당장 세우라!”고 소리쳤지만, 측근들은 “일단 대구에 들러 상황을 알아본 뒤 기차를 돌려도 늦지 않는다”며 만류했고, 이승만은 그러기로 했다.

    대구역에서 경북지사 조재천이 “제가 알아보니 서울 북쪽 방어선에서 아군이 적을 막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하자, 이승만은 ”그렇겠지. 조지사, 기관차를 다시 돌려 올라갈 수 있도록 해라”고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조재천의 권유를 뿌리치고 기차는 20 여분만에 다시 북상했지만, 대전역에서도 비슷한 승강이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서울 가까운 곳에 가야 한다고 우겼고 측근들은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대전으로 달려온 윤치영이 “전투는 군인이 하는 것이고, 대통령은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를 해야한다”고 설득해 이승만은 고집을 꺾었다.

    이날(6월 27일) 오후 7시경, 충남지사 관사에 있던 이승만에게 무초 주한미대사가 와서 “맥아더 휘하 24사단이 한국으로 출동하고, 항공기 3백여 대가 참전키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이승만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승만은 이범석과 윤치영을 불러 “부산으로 내려가 미군 참전에 따른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는 처음으로 대국민 방송을 지시했다. 3일 동안 자기 신변만 챙기고 국민들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게 미국 참전을 알려 국민들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철원 공보처장이 서울 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당직 아나운서를 대기시켰고, 이승만은 방송원고를 구술하면서 황규면에게 받아쓰게 했다. 방송은 그날 밤 10시에 내보내야 했으므로 다시 정서할 겨를도 없었다.

    이승만이 구술한 내용은 대강 “UN에서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군물을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이승만은 즉시 전화 수화기에 대고 구술한 원고를 읽었다. 이것이 그날 밤에 나간 대통령의 녹음방송이다.(이상 황규면 증언)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방송은 오히려 전쟁 초기의 혼란을 부추김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상이 내가 정리한 내용인데, 이를 자세히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전쟁 초기에 이승만은(아니 그 누구도) 전면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국방장관 등이 계속 허위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전면전이며 국군이 곳곳에서 패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국방부만 탓할 상황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만약 정확한 상황판단과 보고가 있었다면 이승만은 보다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적절한 시점을 택해 피난을 갔을 것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상황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이승만은 측근들의 독촉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조금만 늦었으면 대통령이 포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빨리 도망간 것은 아니다. 이승만이 기차를 탈 때는 의정부가 뚫린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황망한 와중에서도 맥아더를 위협하는 등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

    또한 피난을 가면서도 이승만은 내내 국민들에게 미안해 했다. 그래서 측근들과 실랑이를 많이 벌였고, 대구 도착 20분만에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8월 14일,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최악의 경우 남한이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며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권총을 꺼냈고 무초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이승만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무초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프란체스카 증언)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승만은 미리 방송녹음을 하지 않았으며 거의 즉석연설로 방송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송도 UN의 참전을 알려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목적이었다. 그러나 선의에서 한 방송이라 하더라도, 불과 4시간 후에 서울이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국군이 북괴군을 격퇴하여 적이 패주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황규면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이 구술한 방송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승만의 육성방송에 이어 국방부에서 그런 내용을 추가로 방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1969년 경희대 대학원장이던 이선근이 경희대 정치학 석사과정 강의 도중에 고백한 내용이라며, “6·25 때 육본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이 국민과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울을 사수한다는 초기 녹음을 계속 틀었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이선근은 자신으로 인해 ‘어른이 욕 잡수시게 해 드린 것’이라는 증언도 했다고 한다.

    적이 패주하고 있다고 거짓말 방송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비록 이승만이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거짓방송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이승만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책임은 상당량 경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이승만이 뒤집어 쓰기에는 여러가지 정황증거 상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이승만이 먼저 피난 간 것도 따져보자.

    그 자체가 헌법기관인 대통령은 전쟁이 나면 무조건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아마 지금은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만약 이승만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면 그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아마 “등신같이 포로가 된 이승만 때문에 나라가 공산화됐다”는 비난이 영원히 그에게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래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문하고 싶다. “그럼 대통령이 포로가 되었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셋째, 한강교 폭파에 책임져야 한다는 비난에 대해 말해보자.

    한강교 폭파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중앙방송국이 이승만의 방송을 내보낸 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던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각에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지적되고 있는 한강교 폭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폭파시점이 너무 빨랐다 는 것이다.
    문산과 파주 쪽에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다가서면서 그 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어올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명령한 다음 시흥으로 갔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당시 한강교 폭파와 관련된 지휘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등으로 이어진다. 한강교 폭파는 결국 결정적 오판으로 판정돼 최창식 대령은 체포됐고, 1950.9.21 사형선고와 함께 같은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분히 정치적 희생양에 가까웠다. 참고로 최창식 대령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64년 무죄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래서 국군의 재편이 곤란해졌다. 또한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지 못해 적 치하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폭파를 하는 바람에 수백명의 희생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한국전쟁사’ 제1권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한수(漢水) 이북에서 싸우고 있던 장병들 가운데 4만 4천 명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7사단의 경우 (약 1만 명 가운데) 장병 5백 명과 기관총 4정만 도강할 수 있었다. 1사단은 5천 명만 도강하고 각종 대포는 유기되었다. 제2, 3, 5사단 역시 흩어진 채 도강하였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군작전을 신뢰하다가 피난길이 막히게 된 정부 요원들과 시민들은 학살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지 않으면 안되었고, 미처 반출하지 못한 정부 재산은 적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버려진 군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것은 부상자들이었다. 6월 24일 현재 서울시내 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는 약 1,300 명이었다. 여기에다가 3일간의 전투에서 다친 3,200 명의 군인들은 서울대학 부속병원 등 민간병원에도 분산되었다. 서울대학병원은 1개 소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서울대학병원에선 움직일 수 있는 전상자 80여 명이 한 장교의 지휘 하에 뒷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남아 있던 전상자들은 인민군에 의하여 학살당했다.”

    나는 한강교 폭파 시점이 전략·전술적으로 옳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이승만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군부의 군사적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서울시민들을 인질로 만들어 놓고,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폭파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 한강교는, 비록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해도, 온전히 군사전략 또는 군사전술의 일환으로서 폭파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대통령이 책임을 모두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다만 “서울사수 방송”과 마찬가지로, 한강교 폭파 책임을 이승만에게 모두 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있는 이승만의 책임 역시 상당량 경감되어야 한다.

     


  15. 제15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3)

    내용
    제15편 - 소위 이승만의 잘못에 대하여 (3)

    다음은 부산정치파동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승만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고 비난한다. 여기에 대해 말해보자.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1952년의 제2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헌법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국회 구성을 볼 때 이승만의 재당선은 어려웠다. 그것은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김성수가 국회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사실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국회의 반이승만 세력은 이 기회에 내각제로 개헌하여, 이승만을 밀어내고 장면을 수상으로 앉힐 계획을 만들어 미국과 군부의 양해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상에 비협조적인 이승만의 제거에 미국도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승만이 보기에 그의 반대자들은 미국의 정책에 너무나 양순한 자들이었고, 그들이 집권하면 휴전에 따른 영구분단은 피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국회가 아닌 국민들에게 주목했다. 비록 국회에서는 열세지만 국민들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상 첫 지자체 선거였던 4·25 시·읍·면의회 선거와 5·0 도의회 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자들이 많이 당선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기로 작정했다.

    사실 당시 정부체제는 비정상적이었다. 그 원인은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국 당시 정부체제를 놓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한 한민당과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한 이승만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결국 부통령에 총리까지 있는, 게다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가 따로따로 뽑는 기이한 모습으로 출발했다. 한 마디로 어정쩡한 정치형태였던 것이다.

    1951.11.30,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반이승만 세력이 장악한 국회는 재석 163명 중, 찬성 19, 반대 143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재적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123명의 명의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물론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국 대사 무초는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던 선우종원을 통해 지지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국민의 지지를 끌어 내기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1952.5.26, 임시수도 부산과 공비들이 출몰하는 경남·전남북 일대에 계엄을 선포한 다음,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다. 당연히 미국은 이승만의 계엄 선포에 반대했고,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은 계엄사령관 취임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계엄업무를 맡겼다. 헌병들은 국회의원들이 탄 출근버스를 군용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고 10여 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김성수가 부통령직을 사퇴하며 항의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달랐다. 국회와 언론에 의해 수세에 몰렸던 이승만을 지지하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지방의회들은 직선제 개헌안 지지 결의안을 채택했고, 부산에 와서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항의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 폭력조직이 국회의사당에 들어와 국회의원들을 4시간이나 감금하기도 했다. 이런 국민들의 이승만 지지는 이승만의 직선제안이 명분에서 크게 앞섰던 것도 원인이었다.
    이렇게 되자 후방에서 내전이 나면 안되며, 이승만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의 주선으로 이승만과 반대파가 타협하여, 대통령의 직선제에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발췌개헌안’은 이승만의 개헌안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고르고, 국회의 개헌안에서 국무위원 불신임권을 골라 만든 절충안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1952.8.2,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25가 한창인데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시행된 것이다. 유권자의 88%가 참여했고 이승만은 74.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승부수가 통했던 것이다.

    1952년 대통령 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현직 대통령이 재집권하려면 비록 전쟁 중이라도 선거를 통해야 한다는 선례를 남겼다. 민주정치의 기본인 자유선거 제도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거를 참관했던 유엔 선거감시위원단의 보고서도 “경찰의 선거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의 정치는 대의제와 민주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정치는 급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방황하던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 지지로 방향을 확실히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대통령 직선제는 돌이킬 수 없는 우리나라의 정치제제가 되었다. 요즘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대통령 직선제는 이렇게 일견 무리하고 폭력적이었던 이승만의 결정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대통령 직선제가 우리의 기본 정치체제로 자리잡은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나는 내각책임제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국회 다수당이 국정을 담당하는 것은 얼핏 보면 가장 민주적인 체제 같지만, 그만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더구나 내각책임제 하에서는 절대로 국민들이 정권을 바꿀 수 없다. 국민들은 기껏해야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 1명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의원은 특정 계파에 소속된 300명 중 하나에 불과하며, 모두가 자기 보스의 졸개일 뿐이다. 파벌로 운영되는 일본 정치와 3김시대 우리의 국회가 대표적인 예다.

    대부분의 정책과 국회의원이 몇몇 보스들의 뒷거래나 더러운 협상으로 결정되므로,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정권을 바꾼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가 된다. 오직 정치·경제가 개판이 되고, 온 국민이 이를 인식한 다음에야 집권당이 교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나라가 엉망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제니까 그나마 정권을 바꿀 수 있고, 노무현같은 사람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그리고 한심한 인사.
    고백하건대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나는 백과사전을 뒤져봐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 달렸던 댓글을 보니,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해박하게 아시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검색한 결과를 위주로 간단하게만 언급한 다음, 종합적으로 내 의견을 말해 보겠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을 통해 보다 정확한 사실들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보도연맹은 해방공간에서 좌익활동을 했던 전향자들을 모아 만든 반공단체로,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1949년 10월에 조직되었다. 가입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6·25 초기 후퇴과정에서, 정부와 경찰은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했다. 1950.7.21 경북 문경에서 200 명, 영순면에서 300 명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등, 평택 이남의 전지역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한국전쟁 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 학살은 나중에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한국근현대사사전) 국군·헌병·반공 극우단체 심지어 미군도 집단학살에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위키백과)

    하지만 오랫동안 공론화되지 않아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실재했던 사건임이 확인됐다. 2009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재에도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위키백과)

    사망자 수도 제각각이다. 확인된 희생자만 5,000 명이고, 증언에 근거해서 최대 20만 명이라고 하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위키백과), 수만 명 ~ 20만 명이라는 두루뭉수리한 자료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보도연맹 사건에 비해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정도로, 사건발생 직후부터 거창양민 학살사건과 함께 국회에서 공론화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방위군은 중공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많은 병력이 필요했던 당시 실정을 감안하여 설치되었다.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병력 응모를 했는데, 약 50만 명을 모집하여 이들을 경남북도 일원에 설치된 51개의 교육대에 수용하였다.

    1951년 1·4후퇴 때, 정부는 전국 각지에서 창설 작업을 하고 있던 국민방위군을 대구, 부산 등지로 남하시키기 시작했다. 관련 예산도 배정되었다. 6·25 초기,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청년들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북한군에 편재되었던 희생과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열악한 당시 상황에서 이들은 도보를 이용하여 남하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보급품을 착복했다.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장정들이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1,000여 명의 아사자 및 동사자가 발생했다. 수 만 명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해 집단탈출이 일어나기도 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그 해 8월 12일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의 총살형이 집행되었으며, 국민방위군은 해체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도 제각각이다. 두산백과에는 9만명, 위키백과에는 9만 ~ 12만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000 여명이라고 써 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도 간단하게 살펴보자.

    1951년 3월 초순, 국회가 열리고 있던 부산극장에 두 청년이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을 찾아와 “거창에 큰 참변이 났으며 신원면에서 1,000여 명의 부락민들이 집단총살을 당했다”는 등 믿기 어려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신중목은 현장을 돌아보고 요로에 확인하여 참극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이렇게 해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폭로되었다.
    국회에서 국무위원들이 보고할 때도 최종 책임자인 신성모는 “신원면의 희생자는 187명인데, 공비들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즉결 처형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2월 10일 내탄 부락 골짜기에서 청장년 136명을, 11일 박산계곡에서 527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현지조사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내무·법무·국방장관이 사임했으며, 직접책임자였던 대령과 소령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대령)에게는 3년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은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상의 3개 사건들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다. 보도연맹 사건은 누가 지시해서 죽였고, 왜 죽였으며,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은걸까? 아니 누군가의 지시가 체계적인 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은 사실인걸까? 궁금하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경우, 비록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치하가 될 정도로 피아의 구분이 어려웠다지만, 국민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나? 베트콩이 섞여 있는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항간의 루머(?)가 연상된다.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고 해도 모두 비난받아 마땅한 사건임에 틀림 없다.

    분명한 것은 전쟁이란 이렇게 비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행위가 알게 모르게 집단적으로 때로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게 전쟁이다. 이기기 위해 인간은 단순한 소모품이 되는게 전쟁이다.

    인민군은 남한 점령지에서 청소년들을 인민의용군이란 이름으로 강제 징발하여 전력을 보충했고, 후퇴하지 못하도록 발목에 쇠사슬을 매어놓기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지만,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역자들도 마찬가지다. 6·25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던 북한군 10만 명을 위한 보급품 운송에 동원된 남한 주민들은 한 사람 당 보급품 20kg씩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 20km를 걸어서 최전선으로 날랐다고 한다.(이런 군 보급품 운송 부역자들은 3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황이 역전되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청소년들이나 군 보급품을 날랐던 부역자들은 다시 보복의 대상이 되는게 전쟁이다. 그런 식의 보복이 반복되면서 6·25 기간 중 수많은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이 전개된 양상은 대개 패턴화되어 있었다. 인민군에 밀려 급히 퇴각하는 군경이 좌익들을 학살하고, 피해를 입은 집안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면 다시 마을의 우익 인사를 보복 학살하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 또 다시 좌익을 보복 학살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어느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1년에 두어 차례 여러 집안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만 되면 마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고 한다.

    북한만 인민의용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 전황이 워낙 급하다보니 남한의 징병도 마구잡이 식이었다. 피난행렬을 세워 놓고 젊은이들을 색출하여 끌고 가고, 마을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끌고 가고, 학교 정문에 트럭을 세워놓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차곡차곡 싣고 간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승만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3개의 사건에 있어서 그 발단과 전개과정에 이승만이 개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승만이 저런 사건을 명령할 이유도 없다. 보도연맹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시 국회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므로 그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사건이 표면화된 후의 처리과정에서 이승만이 개입한 것은 사실 같다. 
    예를 들어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경우, 신성모가 “전시에 군이 저지른 불미스런 사건이 알려지면, 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이 증폭되고 외국원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하자 이승만은 그 논리에 넘어갔다. 아니 넘어간게 아니라 현실주의자답게 또 다시 현실을 수용했다. 이런 식의 이승만식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인사 능력에 대한 회의로 연결된다.

    이승만은 전쟁 전부터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떠벌이기만 했던 신성모를 끝까지 감쌌다. 김성수 부통령이 주도한 국무회의에서 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민학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신성모를 끝내 주일공사로 임명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건국초기 국회의원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윤영을 두 번이나 국무총리로 지명하거나 예스맨을 중용했던 것도 비판을 받는다. 영어 잘 하는 사람만을 우대했다는 비판도 듣는다.(미국유학파 - 김도연, 김태선, 김현철, 백낙준, 윤치영, 이교선, 이기붕, 임병직, 임영신, 장석윤, 조병옥, 조정환, 최규남, 최순주, 허정. 영국유학파 – 신성모, 윤보선, 장택상 등)

    나중의 일이지만, 이승만이 했던 인사에서 최대의 실수는 이기붕이었다.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삼고, 이기붕을 부통령 런닝메이트로 하여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던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4·19 당시 국민들은, 비록 자유당에는 불만이 많았어도 이승만 개인에게는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이기붕 때문에 그렇게 치욕적이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볼 때 이승만은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승만을 변호하다보니 이번 장을 너무 길게 썼다. 이번 장을 정리해보자.

    지금까지 거론된 모든 잘못에 대해 이승만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국가 수반인 이상 그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성취에는 희생과 무리가 따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갓 태어난 국가가 다시 소멸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는 당시의 시대상황, 그리고 국가 전체가 악취가 진동하는 부패에 찌들어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이승만의 잘못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근본적으로는 바로 김일성·스탈린·모택동과 같은 20세기 3대 악당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절대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하나, 저런 악전고투의 역경 속에서도,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결행되었던 이승만의 결정과 행동들이 단지 무리라는 이유로 회피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전쟁이란 10만명을 살리기 위해 5만명을 죽이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결국 당신은 이승만의 잘못을 모두 시대상황 탓으로 돌리겠다는 것인가?” 하고 물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다. 그게 가장 큰 이유이다”라고 대답하겠다. 이승만을 비난만 하는 사람들은 당시가 비상상황이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이승만의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 회에서 살펴보겠다.

    이왕이면 하나 더 얘기하고 싶다. 중요하고 현명한 대응은 이런 사례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렇게 피로써 지킨 나라를 다시는 뺏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 머지 않아 올 통일상황에서 다시는 보복의 악순환이 북한지역에서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16. 제16편 - 당시 시대상황

    내용
    제16편 - 당시 시대상황

    나는 이승만이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비판한다. 이런 견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과연 그 때 우리가 처한 시대상황은 어땠을까? 6·25는 제외하더라도, 해방 이후부터 6·25 전까지만이라도 살펴보자. 우선 그 5년간의 사건을 기록한 연표를 보자. (짜집기 자료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 1945년 : 소련군, 북한진주(8.12), 청진 점령(8.16), 원산상륙(8.20), 평양점령(8.22). 여운형, 건준(건국준비위원회) 결성(8.17). 우키시마호 침몰(8.24).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언(9.6). 하지 중장 미 24군단 입국(9.8), 서울 점령 및 남한에 군정 실시(9.9). 경의선 철도 운행 중단(9.11). 소련 정치국, 북한 군정실시 공포(9.16). 한민당 창당(9.16).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10.10). 이승만 귀국(10.16).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설립(10.23). 미 LST편으로 잔류 일본군 철수(10.23~11.12일, 약 5만명). 신의주 반공학생의거(11.23).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결정(12.28). 송진우 암살(12.30).

    ○ 1946년 : 공산당,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찬성 결의(1.2). 국방경비대 창설(1.1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16). 미곡수집령(1.25). 북조선 임시위원회 설립(2.8). 북한 토지개혁(3.5). 함흥·흥남 반공학생의거(3.13).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5.15). 이승만 정읍발언(6.3). 전국 콜레라 만연(6.17). 여운형·김규식, 좌우합작위원회 발족(7.25). 북조선노동당 설립(8.29). 9월총파업(9.23). 대구폭동(10.1). 남조선노동당 설립(12.23).

    ○ 1947년 :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2.20). 서울 남대문 좌우익 충돌(3.1). 제주 3·1절 발포사건(3.1). 남로당 주도 전국 총파업(3.22). 제주발 일본행 밀항선 침몰(5.20).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5.21). 여운형 암살(7.19). 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8.28).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반도문제 UN에 상정(9.17). 지청천, 반공 청년단체 대동청년단 결성(9.21). 소련, 미·소 양군 동시 철수 제의(9.26). UN, 토착인구 비례 남북한 총선거 결의(11.14). 장덕수 암살(12.2).

    ○ 1948년 : UN한국임시위원단 입국 및 북한입경 불가(1.7). 2·7 투쟁(2.7). 조선인민군 창설(2.8). UN, 남한만의 선거 결의(2.26). 김구, 남북협상 제의(3.8). 김구·김규식·조소앙·홍명희 등 7인, 5·10선거 반대 공동성명(3.11). 북·중 비밀군사협정 체결(3.16). 제주 4·3사건(4.3). 평양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4.19).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미·소 주둔군 동시철수 결의 공동성명(4.30). 5·10총선거(5.10). 북한, 남한 송전 중단(5.14). 제헌국회 개원(5.31). 조선노동당 창당(6.30). 건국헌법 공포(7.17). 대한민국 초대 정부기구 확정(8.7). 대한민국 건국(8.15).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이양(8.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선거(8.25). 미군정, 경찰권 이양(9.3). 육군·해군 발족(9.5).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9.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9.9). 여순 반란 사건(10.19). 제3차 UN총회,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결의(12.12).

    ○ 1949년 : 중국홍군 베이징 점령(1.31), 난징 점령(4.23). 육군 8연대 2명의 대대장 포함 2대대 병력 집단월북(5.4). 6.6반민특위 습격사건(6.6). 국회 프락치 사건(6.21). 및 김구 암살(6.26). 병역제도 징병제로 개정(8.6). 목포 형무소 수감자 350여 명 집단 탈옥(9.14). 미군 철수 시작(9.15). 소련군, 북한 철수계획 발표(9.19). 국회,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9.22). 소련, 원폭실험 성공(9.22). 중화인민공화국 성립(10.1). 공군 창설(10.12). 소장파 의원 40명 + 김구 세력, 미군철수 긴급동의안 제출(10.13). 장개석 대만으로 탈출(12.10). 중국홍군 청도 점령(12.27).

    ○ 1950년 : 애치슨라인 발표(1.12).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 체결(2.14). 농지개혁법안 통과(3.10).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저런 연표를 볼 때 그냥 읽으면 안된다. 달랑 한 줄로 쓰여진 사건이라고 해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당시의 상황을 눈에 그릴 수 있다. 한 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상상해 봐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보자.

    - 우키시마호 침몰(1945.8.24) 사건.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 동포들을 태우고 오던 우키시마호가 화재로 침몰된 사건이다. 한국인 승선자 3,725명 중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 천 명으로 발표되었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사망자만도 1,000명이 넘었다.(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승선했고, 최소 5,000명이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 당시 재일한국인은 140만 명이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 중 90만 명이 1945년 8월~11월 사이에 들어왔다.
    우키시마호가 대표적으로 거론되어서 그렇지, 낡은 귀국선(일명 똑딱선)의 침몰사고는 너무나 흔했던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해난사고만도 10여 건이고 미확인된 사고도 많다. 걸핏하면 세월호같은 사고가 났지만 잘 알려지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위 연표에는 기술하지 않았지만, 1946년에는 수재민이 4만명이나 발생하는 자연재해도 있었다.

    - 1946년 10월 대구폭동.

    이 사건도 10월 1일 하루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미곡수집령(1.25), 전국 콜레라 만연(6.17), 9월총파업(9.23)과 연결되어 있다. 대구폭동 자체만 보더라도 12월 중순까지 3개월에 걸쳐, 전국 131개 군(郡) 중 절반이나 되는 56개 군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배후에는 조선공산당 세력의 조종이 있었고, 136명의 사망자와 5,000여 명의 검거자가 발생했으며, 계엄령까지 불러들인 대형사건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쌀 ‘자유시장 정책’을 펴자 매점매석과 일본으로의 밀수출이 성행했다. 소매물가는 해방 직전에 비해 30배 이상 올랐다. 당황한 미군정은 일제 말에 있었던 쌀 공출제도를 부활하여 쌀을 강제수매했다. 그러자 농민들은 일제 때보다 못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마침 5월에는 사망률이 무려 60~70%에 달하는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경북에서만 4,000명이, 전국적으로는 11,000명이 죽었다.
    미군정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경북지역의 교통을 차단했고, 그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하던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겨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때를 놓칠 좌빨들이 아니었다. 9월 13일에는 경성철도공장에서 3,000 명이, 9월 23일에는 부산철도국에서 7,000 명이, 9월 24일에는 서울철도청에서 15,000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남한의 철도 교통망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9월총파업).

    미군정은 경찰관 3,000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철도노동자들을 검거하고 서울의 투쟁위원회 본부를 폐쇄시켰지만, 10월 1일 대구에서 1000여 명의 부녀자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 등이 가세하자 시위가 다시 확대되었다. 경찰이 진압을 위해 위협발사하는 과정에서 1명이 유탄에 맞아 죽자, 다음 날 조선공산당은 좌익학생들을 동원해 시체를 들것에 싣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경찰의 총탄에 죽은 학생의 시체라고 선동했다.

    흥분한 학생과 시민들은 대구경찰서 등 26개 지서와 파출소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고 경찰관과 행정관리,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해 방화하고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병력을 파견해 진압했다. 그러나 폭동은 대구 인근지역으로 번졌고, 12월까지 경북 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서울 등에서 계속됐다. 폭동이 끝난 후에도 각 농촌지역의 좌익분자들은 산악지대로 잠입, 게릴라화됐다.(10월폭동).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 1948년 제주 4·3사건.

    이것도 단독사건이 아니고 며칠 만에 끝난 사건도 아니다. 1948.4.3에 시작하여 1954.9.21까지 무려 6년 이상을 끌었고, 사망자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며,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서 가옥 4만동이 소실되었다. 발단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 때문이었고, 당연히 계엄령도 선포되었다. 나도 젊었을 때, “시체가 거리에서 썪고 개가 뜯어먹었다”는 제주도 출신 소설가(현기영으로 기억한다)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 여순반란사건.

    그 뿐만이 아니다.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여수의 14연대에서 남로당원들이 ‘경찰 타도, 제주도 출동 반대, 분단정권 거부’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하사관들을 사살하고,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의 관공서와 주요기관을 포함한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하는 등 완전한 해방구를 만들었다.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의 진압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여순반란사건).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여순반란사건과 맥을 같이 하지만, 군대 내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득실득실하여 숙군작업을 해야 했고, 전국 곳곳의 산악에서는 빨치산이 준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군대 내에는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을까?

    미군정은 국군준비대, 건국치안대 등 기존의 사설 군사단체들을 해산시키고, 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국방경비대는 나중에 정부수립 후 한국 육군이 됨.) 간부양성을 목적으로 했기에 대원들을 미국유학도 시켜주는 한편 군사영어학교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도 운영했다. 국방경비대는 주로 항만·미군부대 등 국가 주요시설의 경비와 제주4·3사건 진압 등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진압 임무를 수행하였다
    시대가 시대인데다가 미 군정도 한 때 좌우합작을 했었기 때문에, 대원들을 뽑을 때 사상에 관계 없이 마구 뽑았다. 좌빨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해체된 좌익계 사설 군사단체 회원들, 좌익활동으로 경찰에 쫓기던 자들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숨어들었다. 국방경비대가 좌익의 은신처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종횡으로 세력을 키우면서 대원들을 부추기고,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일으킨 사건이 1946년 제1연대 1대대 소요사건이었다. 군 내에 침투한 남로당 요원들이 계급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선동해 일으킨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생도대장 폭행사건, 제2연대 부정사건, 영암 군경 충돌사건 같은 소규모 사건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여순반란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나중에는 여순반란사건에 호응하는 ‘호응투쟁’이 대구 6연대에서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 부대는 1948년 8월 1차반란사건을 시작으로, 1949년 1월 30일까지 세 차례나 반란과 소요사건을 일으켰다. 1949년 5월에는 육군 8연대에서 두 명의 대대장을 포함한 2개 대대 병력이 집단월북하기도 했고, 전방 여기 저기서 월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는 군대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뒤엉켜 있는 개판이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으로 좌빨들이 군대 내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숙군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7월까지 진행되어, 전 군(軍)의 약 5%에 달하는 약 5만 명을 숙청했고 이 중 2,000 명 이상을 총살했다.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 당했다. (다 아시다시피 박정희도 이 때 검거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백선엽이 구해줬다.)

    좌빨들이 군대에만 있었을 리가 없다. 사회 곳곳에 숨어들어, 때로는 암약하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국회의원 중 13명이 검거된 국회프락치 사건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랬었다. 그 때는 대한민국 군인의 5%가 공산주의자였다! 초급장교의 1/3이 공산주의자였다! 물론 일부 무리는 있었겠지만 그 때 숙군작업이 없었다면, 이듬해 발생한 6·25는 보나마나 결말이 뻔했다. 그 때는 군대마저 믿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나만 더 얘기하겠다. 바로 빨치산이다.

    빨치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1946년 가을에는 전국노동자평의회가 파업을 했을 때, 제천의 철도 노동자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월악산으로 잠적하여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설도 있고, 제주도의 4·3사건과 더불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여순반란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순반란이 진압되자, 살아남은 반군들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면서 유격투쟁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남부군 사령관으로 잘 알려진 이현상의 지휘를 받았다. 한 때 토벌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지만, 6·25 때 북상하지 못하고 입산한 인민군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세력이 크게 불어났다.
    지리산 뿐만 아니라 월악산, 태백산맥 등에서도 오랫동안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들은 파출소 등 관공서와 기차, 기간시설 등을 습격하고 국가 전복 활동을 했다. 결국 1953년 1월 9일 이현상이 사살되면서 부대는 괴멸되었지만,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1963년 11월까지도 남한에는 빨치산 활동이 계속되었었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로 위기상황의 연속이지 않은가?

    40년 동안이나 피식민지 신민(臣民)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이 모여 갑자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었다. 대한민국은 신생아였다. 더구나 태아 때부터 발육이 부진한 지진아였다. 지진아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유아시절 환경은, 국제정세는 아예 빼고 국내정세만 보더라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문맹률은 80%가 넘었고, 국민소득은 40달러였고, 물가는 폭등하고, 가뭄과 홍수와 태풍은 덮치고, 굶어죽는 자는 부지기수이고, 전염병은 창궐하고, 전기는 끊기고, 산은 민둥산이고, 길은 황톳길이고, 수 백, 수천 명씩 죽어가는 사고는 일상이고, 암살과 테러가 벌어지고, 정당은 400개에 이르고, 국회는 미군철수를 요구하고, 좌빨들의 파업과 폭동은 계속되고, 빨치산은 날뛰고, 사회와 군대와 국회에는 빨갱이들이 암약하고, 군사력은 형편 없는데 반란까지 일어나고, 공권력은 약하고, 행정체계는 엉망이고, 국민들은 이념적으로 분열되고, 전국 방방곡곡이 부패냄새로 진동하던 상황이었다”고 말이다.
    저런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하지 못했다고 이승만을 욕할 수 있는가? 저런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있을 수는 있는가?

    그런데 이승만은 해냈다. 저 난관을 돌파했다.
    위에 열거된 아무 사건이나 골라서,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얼마든지 선거를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 있었는데도, 이승만은 한 번도 국회를 해산하거나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때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동일시하며 굳이 비난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보”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사악한 사람”이다. 그 외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황장엽은 이승만·박정희를 얘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상상태에 있을 때 비상대책을 세운 공로, 이것을 독재라고 하면서 자꾸 깎아 내리는 것,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애국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당하게 문제를 평가하지 않는 그런 양심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물에 빠져 죽으러 들어가는 아이를 때려서 끌어 내오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17. 제17편 - 큰 별은 외롭게 떨어진다

    내용
    제17편 - 큰 별은 외롭게 떨어진다

    이승만에 관해서 쓰려면 한이 없다. 매주 2회씩 이승만을 만나 구술을 받아가며 이승만 자서전을 썼던 시인 서정주의 말대로 “그의 일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또 한 사람의 일생 쯤 소비되어도 아까울게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다. 나중에 서점에 깔렸던 그 자서전을 경찰을 시켜 압수했던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이유는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의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미국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오리지날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이승만이 지었다는 한시(漢詩) 한 수를 감상해보자.

                    桃源故舊散如煙 (도원고구 산여연) – 복삿골의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奔走風塵五十年 (분주풍진 오십년) – 어수선히 지나간 오십년이여

                    白首歸來桑海變 (백수귀래 상해변) – 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

                    斜向揮淚故祠前 (사향휘루 고사전) – 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어릴 때 뛰어 놀았었고, 다녔던 서당도 있었고 그의 조상 사당도 있었던 추억의 남산을 보고 읊은 시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평생을 이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고국에 돌아오니, 벗들은 간데 없고 흰 머리와 늙고 쇠약해버린 자신이 보여서 눈물이 난다는 시다. 왠지 쓸쓸하고 왠지 눈물겹지 않은가?

    그렇게 고집불통이던 이승만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총기는 사라지고 더욱 완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이 다시 쳐들어오니 해군력을 증강하라는 지시까지 내릴 정도였다. 나이도 80을 넘겼고 장관들은 아들 뻘이었다. 그러자 측근들은 ‘인(人)의 장막’을 쳤고 이승만은 이 장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을, 민주당은 조병옥·장면을 내세웠다. 이승만의 인기가 여전한데다가,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미국 육군병원에서 수술 끝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선거의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아니고 누가 부통령이 되느냐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어서 임기를 못 채울 가능성이 컸고, 그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하기 때문이었다.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집권당이 바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사력을 다 해 선거에 임했고, 그 때문에 자유당은 사전투표, 유령투표, 반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광범위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로 7명이 사망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승만은 유효투표의 97%를, 이기붕은 76%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러나 여론은 싸늘했고 부정선거의 증거가 연이어 폭로되면서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산에서 중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 위로 떠 올랐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향했고,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4·19 학생의거였다.

    인의 장막에 가려있던 이승만은 뒤늦게야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은 송요찬 계염사령관을 대동하고 서울대부속병원을 방문, 입원 중인 부상자들을 문병했다. 학생들 상처를 돌보고 이마를 짚으면서 “하루 속히 낫도록 하라”고 위로했다. 학생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는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야. 젊은 학생들은 참 장하다”는 말도 했다.

    당시 학생대표로 이승만을 면담했던 유일나의 증언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중략)… 이박사는 놀라는 표정으로 ‘하야라니. 그러면 날더러 물러나라는 얘기냐? 또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으로 가서 살라고?’ 하면서 얼굴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안고 있던 개 해피도 놓쳐버렸다. 나는 ‘국민이 원합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에 이박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체념한 듯 ‘국민이 원해?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이 나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되뇌였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땀에 젖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이박사는 ‘알겠다. 잘 왔다.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나도 젊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많은 일을 했었지. 이제 나가서 내가 하야한다고 말해도 되네. 가보게’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승만의 하야에 대한 다른 증언도 있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마지막까지 이승만 곁을 지켰던 김정렬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은 누구의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하야 결단을 내렸다’고 증언한다.

    “4월 19일 대대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난 후, 국무위원들은 줄곧 중앙청 내 국무위원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사태 수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4월 26일 아침 9시,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경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략)… 대통령에게 어제 이기붕 국회의장 집이 습격 당한 것 등을 포함해 상황을 간략히 보고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라는 짤막한 대답을 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해왔다.

    그리고는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하고 묻고는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무의식 중에 ‘각하,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래, 그렇게 하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지’ 하고는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내가 부를 터이니 받아 쓰게’ 하더니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원한이 없다. 공산주의에 대하여서는 부단한 주의를 하라’ 는 요지의 (하야) 성명서를 구술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그 소식을 들은 이기붕 가족은 자살했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 사저로 갔다. 가는 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老) 애국자를 환송했다.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에게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위로전화와 격려편지가 쇄도했다. 대만 장개석의 위로편지를 읽은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유당 정부 치안국장이었던 전 국회의원 최치환씨의 증언.
    “내가 왜 장 총통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가? 이 편지를 돌려 보내고 싶다. 불의를 보고 방관하지 않는 100만 학도가 있고 국민들이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위로 편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승만은 한 달 정도 이화장에 머물다가 혼란한 정국에서 이승만의 국내 체류를 부담스러워하는 정치세력들 때문에, 2~3주 정도만 피해있을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교포들은 이승만이 잠시 머물 것이라는 생각에 침실 2개가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인 윌버트 최의 별장으로 모시고 갔다.

    이를 흔히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이라고들 말하지만 잘못된 표현이다. 이승만은 망명을 한 적이 없다. 망명은 본인의 망명신청과 상대국의 망명수락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망명신청을 한 적도 없고, 미국도 망명을 거부하거나 받거나 한 적이 없다.

    이승만은 5년 2개월 동안의 하와이 생활에서 돈이 없어 교포들과 미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았다. 체류 막바지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매월 200 달러를 생활비로 보내줄 정도였다. 이승만 부부를 도운 미국인 가운데는, 1920년 말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로 부임하기 위해 몰래 배를 탔을 때,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가도록 도와준 친구 보스윅도 있었다.

    이승만은 건강이 나빠져 미 육군병원에 자주 갔다. 혈압 위험 때문에 주변에서는 감정을 건드릴 만한 바깥 세상 문제는 알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마지막까지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그 정권의 성격에 대해 알지 못했다.
    2~3주의 예정이 하염 없이 길어지자 이승만은 답답해했고 귀국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이승만의 귀국 열망은 병으로 변했다. 양아들 이인수와의 대화다.

    “얘야, 우리나라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

    “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돈이 없어 한국으로 못가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시장을 보고 오면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려고 그렇게 물건을 많이 사느냐”고 신경질을 부려, 프란체스카도 시장을 몰래 다녀와야만 했다. 이발비를 아끼려고 머리도 프란체스카가 직접 깎았을 정도였다.

    이인수와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언제나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되느냐?”

    “한 서너달 지나면 한국이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

    “내가 전에 가려고 할 때도 석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아, 그런데 또 서너 달이야 ?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1962년에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여기 데려다 붙잡아 두고 있는가 하는 거야”라며 흥분하기도 하고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갈테다”라고 신발을 찾기도 했다.

    노인성 치매현상이었다. 한 때 맹수같았던 그가 우리에 갖힌 늙은 동물이 되었으니 병이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측근들은 더 이상 귀국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내에서도 이승만 환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귀국을 달가와하지 않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언론들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는 분위기였다.(우리나라는 언제나 정권이 바뀌면 여야 할 것 없이 전임자를 공격한다.) 그래서 프란체스카 여사 등은 이승만과 의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는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예정일은 1962년 3월17일.
    이승만은 출발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기분이 좋아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출발 직전 서울 정부의 귀국 불허가 통보되었다. 극도로 낙심한 이승만은 그날 이후로는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하와이 각처에서 동정과 호의가 잇따랐고, 하와이 교민들은 한국정부의 처사에 대해 분개했다.

    이승만 부부는 독립운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의 주선으로 마우날라니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호스를 입에 문 채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고인의 영구는 7월 21일 오후 고인이 세웠던 한인기독교회 안에 안치되었다. 거구의 한 미국인이 관 앞으로 걸어와 베일을 걷어내고, 이승만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1920년 이승만이 상해로 잠입할 때 관을 짜 준 평생친구 보스윅이었다.

    이승만의 영구는 다시 하와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진주만의 히컴 공군기지로 갔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두 번이나 졸도해서 운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히컴 기지에서 미군 의장대가 사열하는 가운데 조포가 발사되었고,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윽고 유해가 C-118 미군 수송기에 실리자, 밴 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16명이 비행기에 올랐다.

    7월 23일, 박정희가 영접한 김포공항에 도착한 영구는 빈소인 이화장으로 옮겨졌다. 건국의 아버지이므로 당연히 국장으로 모셔야 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한 등급 낮추어 국민장으로 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의견이 조정되지 못하자 가족장으로 하게 되었다.
    7월 27일, 이승만의 영구는 모교인 배재고 학생들이 든 만장 행렬과 함께 그가 다니던 정동 제일감리교회로 옮겨져서 영결예배를 가진 다음, 자동차 편으로 동작동 국군묘지로 향했다. 길거리의 넘치는 사람들 때문에 영구차는 사람이 걷는 속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리고 숭의여고 합창단의 “해 저물어 날 이미 어두우니”라는 조용한 찬송가 소리와 함께 땅에 묻혔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박정희의 조사(弔辭)를 소개한다. 아마 이 조사는 이승만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 중 하나일 것이다.

    “조국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으뜸 공신)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故) 우남 이승만 박사 영전에 성심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사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塵世, 먼지 자욱한 세상) 인연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범인용부(凡人庸夫, 어리석은 필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反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쫓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십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십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革命兒)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 노구(老軀)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 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萬難)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 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建國人)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金文字)였던 것입니다.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노역(勞役)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 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었고, 또 그 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 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賢明)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究竟-마지막)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의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 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제일성(第一聲)은 오늘도 오히려 이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사활의 잠언(箴言)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 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빈(海濱 beach)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도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創軍)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多難)한 앞길을 열어주 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8. 제18편 - 에필로그

    내용
    제18편 - 에필로그

    이인호 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 곧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였다. 그것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주창되었던 러시아 혁명 등에 비견될 만한, 우리 역사상 유일한 혁명이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며, 대한민국의 건국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유일하고도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인 이승만은(서재필도 박사라고 불렸지만, 실은 의사를 뜻하는 doctor라 그렇게 호칭 되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최초로 근대문명의 본질을 배우고 이해한 사람이다. 이승만은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였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은 당시 세계 최첨단 지식인이었고, 세계질서와 국제룰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불굴의 신념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을 세웠고, 공산화의 위기를 극복했다.

    나라가 망하거나 나라를 새로 세우는 일은 수 백년에 한 번 발생하는 매우 드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자체가 평상시의 환경과 같을 리가 없다. 이런 격변의 환경에서 나라 만들기”를 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평상시의 법적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법을 뛰어넘은 역사적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 당연하다.   

    또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의 정치원리를 자유민주주의로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할 것인가, 경제원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할 것인가 공산주의 계획경제로 할 것인가를 두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도 없다. 오직 리더의 지식과 가치관으로 결정된다. 역시 당연하다.

    수 천년간 왕조의 신민으로 살았고, 끝내는 나라마저 빼앗겨 40년간이나 이민족 제국주의의 노예로 살았던 무식한 백성들을 이끌고 나라를 만들어야 했던 리더 이승만은, 그런 새 역사의 여명에서부터 탁월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운명적으로 따라오는 난관을 불굴의 투지와 리더십으로 돌파했다. 유영익 교수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나라는 불과 두 세대만에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자유, 인권 등 전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에 접근해 있다.(정치는 빼야겠지?) 경제만 보더라도 미·일·독·중과 더불어 경쟁력 있는 종합제조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88올림픽 때 동구인들에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도록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모든 성취가 막강했던 공산 종주국 소·중의 의도를 격파하고 이룬 것이에 더욱 빛날 수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신생국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우리만의 성취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80여 개 신생국 중 최악의 조건에서도 단연 1등을 했고, 그 바탕에는 이승만이라는 리더가 있었던 것이다.

    승만(承晩)이라는 이름은 늦게 왕위에 오른다(계승한다)”는 뜻이다. 과연 이승만은 73세가 되어서야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개국의 왕 후보답게 젊었을 때부터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의 사전에는 ‘주눅 들다’는 말이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소개드렸지만, 해방 전에는 망국 조선의 이름 없는 망명객인 주제에, 해방 후에는 언제 망할지 모를 정도로 볼품 없는 작은 나라의 대통령인 주제에,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들을 비롯한 수 많은 위인들과 정면대결을 했고, 상당부분은 그들을 굴복시켰다. 

    서양인이었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조차 이승만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평생을 전통적인 한국 여인네처럼 행동해야 했다. 이승만은 시인 서정주 앞에서도 프란체스카에게 “겟 아웃!” 하고 소리를 질러, 여사가 아무 말도 못하고 주춤주춤 눈치보며 물러나게 만들 정도였다.(이걸 카리스마라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승만의 성격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소개한다. 작가 강준식의 분석이다.
    “이승만은 백호상이다. 흰 범, 곧 백호는 감춰진 공력이 엄청나므로 산 속에 사는 맹호보다 훨씬 고수다. 그래서 누런 범, 곧 황호상의 김구도 이승만 앞에서는 꼬리를 내려야 했다.
    김구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해 이긴 사람이 없었다. 가령 하와이에서 그와 맞섰던 박용만은 북경에서 암살당했고,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을 보였던 김구는 흉탄에 쓰러졌으며, 한강변 30만 명의 인파로 위협적 세를 보였던 신익희는 대선 직전 급서했고,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또한 갑자기 병사했다. 또 216만 표의 위협적 득표를 보였던 조봉암은 대선 후 형사(刑死)의 비운을 당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도전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인을 제압하는 백호의 힘이었을까?
    운세만 센 것이 아니었다. 기도 강해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오금이 저려 옴쭉달싹 못했다고 한다. 카리스마 지도자였다.”
    한 나라를 세운 위인들은 예외 없이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거꾸로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는 사람은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은, 당시 우리나라 지도자들 중에서 나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퍼스낼리티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그의 카리스마가 한고조 유방이나 김일성같은 “무식쟁이 카리스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국제질서를 이해하고 예견하고 추진한 “박사 카리스마”였다. 세계인들이 옳다고 믿는 자유민주자본주의”를 이 땅에 구현한 자유주의자 카리스마”였다. 
    그러므로 그는 애초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기 위한 후진국형 독재자가 될 수 없었다. 그가 비록 독재는 했지만, 그의 독재는 이 메마르고 척박했던 땅에 “자유민주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착근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독재”였다. 

    나는 우리가 이승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이 시리즈 도입부에서 말했다. 우리는 왜 편견을 가지게 된 걸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그 원인도 잠깐 분석을 해 보자. 
    해방 후, 우리는 오랫동안 개발독재”, 소위 “선의의 독재” 하에서 살았다. 독재체제는 어쨌든 도덕적 정당성에서 약점이 있었기에, 국사교육에서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인 근현대사를 외면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는 구한말 이후의 역사를 형식적으로만 기술했다. 하긴 개발독재의 역사적 당위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기도 했고, 또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건드려봐야 밥줄 끊어지게 되므로 역사학자들도 근현대사 연구를 외면했다.

    개발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자와 좌빨과 좌빨의 후손들이 혼재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개발독재자들의 약점인 이 역사의 공백에 주목했다. 역사의 블루오션이자 독재자들에 대한 기막힌 공격포인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 공백을 연구하고 책으로 발간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 완결편이다.

    한편 개발독재 체제에서도 계속된 민주 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들이 대학으로, 사회로 진출했다. 새 세대들은 젊은 만큼 정의감이 넘쳤다. 그들이 읽은 블루오션의 역사는 너무나 새롭고 경이로우며 울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전교조나 학원강사나 사이비 시민운동가가 되어, 어린 학생들과 순진한 국민들을 세뇌하고 선동했다.
    그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는 친일주의자·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역사이며, 아직도 우리나라는 미 제국의 꼭두각시이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 왔으므로 뒤집어야 한다고 썼다.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제와 충돌한 사건을 우리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하고, 마적단이 약탈행위 때문에 일제와 싸운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이승만·박정희 때문에 조국이 분단되었고 고착되었다고 적반하장의 논리를 폈다.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참담한 인권말살 역사에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다보니, 눈에 띄는 모든 불합리가 이승만, 박정희의 때문이라고 하고,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거나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했던,  4·3사건 주동자와 빨치산 게릴라과 윤이상같은 자들을 찬양하고 기념한다.

    북한의 KAL기 폭파와 천안함 폭침을 정권의 선전물이라고 하고, 북한의 저 막장 반인권·반민족 세습정권에도 눈을 감으며, 애들에게 체 게바라 사진을 넣은 유니폼을 입힌다. 한 마디로 레닌이 서구의 정신나간 좌파 지식들을 지칭했던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항할 정통 역사학자들이 없었기에, 이들의 악마적 상술에 우리사회는 오랫동안 속수무책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짝퉁 상품의 천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한 국민들의 상식과 인식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이를 바로잡으려는 역사학자·경제사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눈에는 불과 2세대만에 80개국 중 1위를 한 나라가, 이렇게 자유와 인권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 나라가, 60년 전에 비해 이렇게 환경이 깨끗해지고 기대수명이 2배 가까이나 늘은 나라가, 강력한 자주 국방력을 갖춘 나라가, 지니계수가 세계평균보다 훨씬 낮은 나라가,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델국가로 간주되는 나라가, 가난한 장교들이 주도한 5·16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친일파들이 모두 사라진 나라가, 왜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친일파가 권력을 이어가고, 부익부 빈익빈이고, 실패한 나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연구해보니 거의 모두가 거짓이었다. 사실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수치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대부분이 악의적 해석의 결과임이 드러났다. 특히 구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와 그로 인해 인해 쏟아져나온 비밀문건들은 그들의 연구를 튼실하게 받쳐주었다. 탈북자들에 의해 우리의 반쪽인 북한의 실상까지 알려지자 모든 것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객관적 진실에 가까이 가게 되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이승만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만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을 했던 것이다.

    이제 이 시리즈를 끝내자.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지만 아직도 미완성인 대한민국에 대해 무슨 꿈을 꾸었을까? 아니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2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본 시리즈를 마치겠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

    첫째, 1955년 진해 휴양지에서 있었던 이승만과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과의 대화.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과연 우리는 그 30년을 바쁘게 뛰었고, 1985년 즈음에는 경제성장률, 국제수지, 저물가 등 3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면서, 거시경제 지표에서 세계 1등으로 질주하면서 중산층을 대거 육성함으로써, 몇 년 후 다가 올 민주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둘째는 바로 공산주의와 관련된 그의 말이다.  
    이승만이 4·19 후 하야성명에서 ”공산주의를 부단히 주의하라”고 국민들에게 주문했었음은 이미 밝혔다.
    이승만은, 죽기 전 하와이의 병상에 누워 아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우리나라 통일이 문제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통일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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